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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통영상륙작전 지휘관 '김성은'장군
대한민국 해병대를 '귀신 잡는 해병대'라고 지칭하는데 이 수식어는 6.25당시 한국군 최초의 단독작전이고 해병대 최초의 상륙작전일 뿐 아니라, 이 승리로 인해 6.25전쟁을 역전시키는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통영 한산대첩과 더불어 한국 전쟁사에 큰 의미를 가진다. 김서은 장군은 1924년 3월 14일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으며 해군병학교 졸업으로 소위로 임관했고 만28세에 장군(준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15대 국방장관을 역임하였고 그는 통영상륙작전은 물론 영덕.안동지구 작전, 홍천.가리산지구 전투 등에서도 전공을 세웠고 1951년 태극무공훈장, 미 은성무공훈장과 미 공로훈장등 수 많은 훈장을 받은 인물이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을 전주, 함양, 진주등에서 저지시켰고, 부산 공격을 위해 진동지구를 점령한 북한군 제6사단을 기습공격하여 적 200여명을 사살했다.
이후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이 완고하게 저항하자 북한군은 마산, 진해, 부산을 우회해 공격하고자 북한군 7사단이 통영을 점령하였다. 이에 김성은장군은 거제도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하다 통영을 직접 상륙하여 소탕작전을 펼칠것을 상부에 다시 건의하여 당년 8월 17일 원문고개와 망일봉으로 나누에 상륙작전을 통한 기습공격을 감행해 통영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 승리로 남측의 마지막 보루였던 진해, 마산과 부산 공격을 위한 북한군의 거제도 포병의 진지 구축을 사전에 봉쇄함으로써 역으로 한국군이 반격의 교두보를 만들었다. 한국전쟁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만약 해병대 통영상륙작전이 실패했다면 6.25전쟁의 결과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고 있다. 해병대가 통영에서 적을 막지 못했다면 인민군 7사간은 진해와 부산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포병부대를 거제도에 주둔시켰을 것이고, 거제에서 완전한 포 사정거리가 되는 부산은 물론 당시 임시정부와 진해, 마산, 부산의 수천만 피난민들의 피해는 충분히 상상이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전투는 임진왜란을 반전시킨 한산대첩과 유사한 면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한산대첩이 겨내량에서 시작되었듯이 통영상륙작전도 견내량(장평리)에서 시작되었다.
적을 속인 작전 또한 유사하다. 이순신은 적선을 넓은 곳으로 끌어내기 위한 유인작전을 펼쳤고 김성은 장군은 해군함정의 유도포 공격으로 적들을 통영시내로 유인시켜 견내량을 통해 망일봉과 원문고개를 장악하고 적을 가두는 전술을 구사했다. 통영상륙작전의 승리는 맥아더 장군이 준비하고 있던 인천상륙작전의 자신감이 되었다. 이 전투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해병들을 인천상륙작전에 투입하였고 이들은 9.28 서울수복작전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성은 장군은 '이순신을 떠올리며 전쟁에 임했다'고 회고록을 통해 말하고 있다. 실제로 당시 충렬사와 세병관 그리고 주민들이 피해를 입을까 폭발하지 않는 무쇠탄을 사용해 적을 교란만 시키고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해병대의 실제 투입으로 적을 장악했다. 그가 이순신의 후예였음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그는 통영을 탈환하고 부하들과 충렬사를 찾아 이순신장군께 승리에 감사하는 절을 올렸다고 한다. 한산대첩의 전사자가19명인데 통영상륙작전의 전사자도 19명이다. 통영상륙작전에서 전사한 해병들은 현재 용남면 두타사 '해병의 집'에 모셔져 있다.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8월 한산대첩축제와 더불어 전국 해병과 유족 현역들이 통영지구전투전적비에서 통영상륙작전 전승행사및 추모제를 개최하고 있다. 김성은 장군은 2007년 6월 15일 영면하시여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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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통영상륙작전 지휘관 '김성은'장군
대한민국 해병대를 '귀신 잡는 해병대'라고 지칭하는데 이 수식어는 6.25당시 한국군 최초의 단독작전이고 해병대 최초의 상륙작전일 뿐 아니라, 이 승리로 인해 6.25전쟁을 역전시키는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통영 한산대첩과 더불어 한국 전쟁사에 큰 의미를 가진다. 김서은 장군은 1924년 3월 14일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으며 해군병학교 졸업으로 소위로 임관했고 만28세에 장군(준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15대 국방장관을 역임하였고 그는 통영상륙작전은 물론 영덕.안동지구 작전, 홍천.가리산지구 전투 등에서도 전공을 세웠고 1951년 태극무공훈장, 미 은성무공훈장과 미 공로훈장등 수 많은 훈장을 받은 인물이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을 전주, 함양, 진주등에서 저지시켰고, 부산 공격을 위해 진동지구를 점령한 북한군 제6사단을 기습공격하여 적 200여명을 사살했다.
이후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이 완고하게 저항하자 북한군은 마산, 진해, 부산을 우회해 공격하고자 북한군 7사단이 통영을 점령하였다. 이에 김성은장군은 거제도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하다 통영을 직접 상륙하여 소탕작전을 펼칠것을 상부에 다시 건의하여 당년 8월 17일 원문고개와 망일봉으로 나누에 상륙작전을 통한 기습공격을 감행해 통영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 승리로 남측의 마지막 보루였던 진해, 마산과 부산 공격을 위한 북한군의 거제도 포병의 진지 구축을 사전에 봉쇄함으로써 역으로 한국군이 반격의 교두보를 만들었다. 한국전쟁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만약 해병대 통영상륙작전이 실패했다면 6.25전쟁의 결과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고 있다. 해병대가 통영에서 적을 막지 못했다면 인민군 7사간은 진해와 부산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포병부대를 거제도에 주둔시켰을 것이고, 거제에서 완전한 포 사정거리가 되는 부산은 물론 당시 임시정부와 진해, 마산, 부산의 수천만 피난민들의 피해는 충분히 상상이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전투는 임진왜란을 반전시킨 한산대첩과 유사한 면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한산대첩이 겨내량에서 시작되었듯이 통영상륙작전도 견내량(장평리)에서 시작되었다.
적을 속인 작전 또한 유사하다. 이순신은 적선을 넓은 곳으로 끌어내기 위한 유인작전을 펼쳤고 김성은 장군은 해군함정의 유도포 공격으로 적들을 통영시내로 유인시켜 견내량을 통해 망일봉과 원문고개를 장악하고 적을 가두는 전술을 구사했다. 통영상륙작전의 승리는 맥아더 장군이 준비하고 있던 인천상륙작전의 자신감이 되었다. 이 전투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해병들을 인천상륙작전에 투입하였고 이들은 9.28 서울수복작전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성은 장군은 '이순신을 떠올리며 전쟁에 임했다'고 회고록을 통해 말하고 있다. 실제로 당시 충렬사와 세병관 그리고 주민들이 피해를 입을까 폭발하지 않는 무쇠탄을 사용해 적을 교란만 시키고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해병대의 실제 투입으로 적을 장악했다. 그가 이순신의 후예였음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그는 통영을 탈환하고 부하들과 충렬사를 찾아 이순신장군께 승리에 감사하는 절을 올렸다고 한다. 한산대첩의 전사자가19명인데 통영상륙작전의 전사자도 19명이다. 통영상륙작전에서 전사한 해병들은 현재 용남면 두타사 '해병의 집'에 모셔져 있다.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8월 한산대첩축제와 더불어 전국 해병과 유족 현역들이 통영지구전투전적비에서 통영상륙작전 전승행사및 추모제를 개최하고 있다. 김성은 장군은 2007년 6월 15일 영면하시여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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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통영상륙작전 지휘관 '김성은'장군
대한민국 해병대를 '귀신 잡는 해병대'라고 지칭하는데 이 수식어는 6.25당시 한국군 최초의 단독작전이고 해병대 최초의 상륙작전일 뿐 아니라, 이 승리로 인해 6.25전쟁을 역전시키는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통영 한산대첩과 더불어 한국 전쟁사에 큰 의미를 가진다. 김서은 장군은 1924년 3월 14일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으며 해군병학교 졸업으로 소위로 임관했고 만28세에 장군(준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15대 국방장관을 역임하였고 그는 통영상륙작전은 물론 영덕.안동지구 작전, 홍천.가리산지구 전투 등에서도 전공을 세웠고 1951년 태극무공훈장, 미 은성무공훈장과 미 공로훈장등 수 많은 훈장을 받은 인물이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을 전주, 함양, 진주등에서 저지시켰고, 부산 공격을 위해 진동지구를 점령한 북한군 제6사단을 기습공격하여 적 200여명을 사살했다.
이후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이 완고하게 저항하자 북한군은 마산, 진해, 부산을 우회해 공격하고자 북한군 7사단이 통영을 점령하였다. 이에 김성은장군은 거제도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하다 통영을 직접 상륙하여 소탕작전을 펼칠것을 상부에 다시 건의하여 당년 8월 17일 원문고개와 망일봉으로 나누에 상륙작전을 통한 기습공격을 감행해 통영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 승리로 남측의 마지막 보루였던 진해, 마산과 부산 공격을 위한 북한군의 거제도 포병의 진지 구축을 사전에 봉쇄함으로써 역으로 한국군이 반격의 교두보를 만들었다. 한국전쟁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만약 해병대 통영상륙작전이 실패했다면 6.25전쟁의 결과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고 있다. 해병대가 통영에서 적을 막지 못했다면 인민군 7사간은 진해와 부산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포병부대를 거제도에 주둔시켰을 것이고, 거제에서 완전한 포 사정거리가 되는 부산은 물론 당시 임시정부와 진해, 마산, 부산의 수천만 피난민들의 피해는 충분히 상상이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전투는 임진왜란을 반전시킨 한산대첩과 유사한 면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한산대첩이 겨내량에서 시작되었듯이 통영상륙작전도 견내량(장평리)에서 시작되었다.
적을 속인 작전 또한 유사하다. 이순신은 적선을 넓은 곳으로 끌어내기 위한 유인작전을 펼쳤고 김성은 장군은 해군함정의 유도포 공격으로 적들을 통영시내로 유인시켜 견내량을 통해 망일봉과 원문고개를 장악하고 적을 가두는 전술을 구사했다. 통영상륙작전의 승리는 맥아더 장군이 준비하고 있던 인천상륙작전의 자신감이 되었다. 이 전투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해병들을 인천상륙작전에 투입하였고 이들은 9.28 서울수복작전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성은 장군은 '이순신을 떠올리며 전쟁에 임했다'고 회고록을 통해 말하고 있다. 실제로 당시 충렬사와 세병관 그리고 주민들이 피해를 입을까 폭발하지 않는 무쇠탄을 사용해 적을 교란만 시키고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해병대의 실제 투입으로 적을 장악했다. 그가 이순신의 후예였음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그는 통영을 탈환하고 부하들과 충렬사를 찾아 이순신장군께 승리에 감사하는 절을 올렸다고 한다. 한산대첩의 전사자가19명인데 통영상륙작전의 전사자도 19명이다. 통영상륙작전에서 전사한 해병들은 현재 용남면 두타사 '해병의 집'에 모셔져 있다.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8월 한산대첩축제와 더불어 전국 해병과 유족 현역들이 통영지구전투전적비에서 통영상륙작전 전승행사및 추모제를 개최하고 있다. 김성은 장군은 2007년 6월 15일 영면하시여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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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잡는 해병대의 유래 '마거릿 히긴스' 여기자
1950년(뉴욕 헤럴드 트리분)지의 도쿄 특파원이었던 여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는 북한 공산군의 6.25남침 소식을 접하자 전쟁발발 이틀 후인 6월 27일 김포공항에 도착, 한국 전선에 뛰어들어 열정적 취재로 독자들에게 한국전쟁을 생생하게 전하였으며 1951년 한국전쟁(War in Korea)이란 책을 집필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수개국어로 출판되어 대단한 인기도 끌었다. "드레스보다 전투복이 잘 어울리는 기자" "화장품보다 진흙과 먼지를 바른 여자" "남자보다 더 용감한 아름다운 여자"라고 미 언론들은 그녀를 묘사하였으며 또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의 마지막 보루인 부산.거제 사수를 위해 한국해병 단독(불과 500여명의 소수병력으로)으로 해군 함정의 지원 엄호를 받으며 북한군 7사단을 기습하여 통영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끌어내자 당시 외신 여종군기사진 마거릿 히긴스는 (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 한국해병은 귀신이라도 잡겠다(UPI통신) 기사를 써서 그때 이후로 한국해병에 "귀신잡는 해병대"라는 별칭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한국전 휴전 후에는 새로운 분쟁 지역인 베트남을 비롯 동남아에서 취재활동을 하던 중 불행하게 풍토병에 걸려 1966년 1월 3일 라오스에서 46세의 젊은 나이레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마거릿 히긴스는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