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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 장날을 기하여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든 20여 군중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서 관공서를 파괴하고 공문서를 소각하였다. 이날 오후 마산에서 출동한 왜헌병에게 수천명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공은 시위군중들에 의해 포승을 풀고 피신할수 있었다. 공을 검거하기 위해 왜헌병은 아우님 용정과 모주와 부인 인천이씨에게 모진 고문을 가했는데 아우님인 장독으로 병을 얻어 수년후에 사망하였고 부인은 현재 90 노령에 당시의 상처로 머리와 얼굴에 큰 흉터가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한다. 공은 공소 시효가 만료될 때까지 피신해 다니면서도 이희석선생과 뜻을 모아 한문서당 막원재에 대산강습소를 설치하여 이 고장 젊은이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또한 사업에도 지극한 관심을 기울여 1926년 함안 가야문 직전 도로 개설을 건의하여 공사추진중 완고한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동분서주하면서 그들을 설득하며 도로 부지 수천평을 기증받아 성사시켰다. 46세때 유림의 천거로 함안향교 전원으로 선임되어 8년동안 재임하면서 충효 사상 앙양에 주력하였다. 1945년 몽매에도 그리던 조국광복을 맞았으나 그 환희 그 감격도 순간이요 국토와 민족이 남북 좌우로 분열되매 주소로 통탄해 마지 않던 중 민족 상잔의 6.25사변이 일어나자 비탄 하시면서 분노 한끝에 심화 병을 이러켜 1년 가까이 병석에 신음하다가 1951년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긴 시문이 전화로 산일되었음이 한스러우나 장남 희제를 비롯한 5남 4녀가 모두 화목하고 안정된 가정을 이루고 장손 상래를 비롯한30여명의 친외손들이 다 장래가 촉망되는 청소년임은 공의 유덕이라 하겠다. 향후배로서 구성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