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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6.25전쟁 이전 구국활동 정부수립 전후 경찰은 38선 경비와 북한의 인민유격대 진압을 담당하였다. 1949년까지는 미군과 함께 38선 경비를 담당하였고, 미군 철수 후에는 국군과 함께 경비하였다. 군 조직으로서 1946년 창설된 국방경비대는 '경찰 예비대' 역할에 머무르다 정부수립 이후 국군으로 정비되었다. 광복이후 좌우익간의 대립 무력충돌이 잦았고, 북한의 인민유격대 침투, 38선 주변의 국지도발, 1949년 6월 미군철수 등으로 경찰의 준군사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경찰의 준군사활동으로 인해 경찰력은 매년 증가되었고, 1949년 10월 20일 치안국에 비상경비총사령부가 설최되어 경찰을 총지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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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경찰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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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북한 인민유격대 진압 북한 인민유격대는 1948년 11월 14일부터 1950년 3월 28일까지 10회에 걸쳐 총 2,345명이 남한에 침투하였고, 경찰과 진압작전으로 2천여 명이 사살 또는 생포되는 등 6.25전쟁 이전 대부분 궤멸되었다. 1946년 대구 10.1사건을 계기로 지하활동 과정에서 형성된 야산대(野山隊)를 중심으로 1949년 7월 조선인민유격대(일명 빨치산)가 창설되었다. 6.25전쟁 이후 북한으로 퇴각하지 못하고 남은 북한군및 유격대원이 1955년까지 태백산및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하며너 후방을 위협했다. 경찰과 군은 총2차(1차 : 1951.12~1952.3./ 2차 : 1953.12~ 1954.4)에 걸쳐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55년 소수 남은 망실공비 이외의 인민유격대는 토벌되었다. 인민유격대 토벌과정에서 많은 경찰들이 전사 또는 순직하였다. 빨치산은 1945년 광북이후부터 1948년 여순 사건과 1950년 6.25전쟁을 거쳐 1955년까지 활동했던 공산주의 비정규군을 말한다. 빨치산은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zan), 곧 노동자나 농민들로 조직된 비정규군을 일컫는 말로 유격대와 가까운 의미이다. 이것이 이념분쟁 과정을 통하여 좌익계통을 통틀어 비하하고 적대감을 조성하는 용어로 표현된것이 '빨갱이'다. 흔히 '조선인민유격대'라고 부르며 '공비', '게릴라'등의 표현도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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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6.25전쟁속 경찰의 활약 6.25전쟁 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두 달 뒤 경상사를 제외한 남한 전역이 점령당했다. 그 후 3년이 넘는 기간등안 남측만 민간인 37만여 명과 국군 13만7,000여명이 사망했다. 경찰도 1만648명이 전사하고, 부상자는 7,000여명에 달하는 등 많은 희생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강원도 춘천경찰서 내평지서장 노종회 경감 등 경찰관및 청년단원 약 15명은 북한군 제2사단및 제12사단의 진격을 약 1시간 동안 저지하다가 전멸했다. 그들의 희생으로 국군 제6사단이 소양강방어전선을 구축하여 6.25전쟁의 최초 승전인 춘천지구 전투의 초석이 되었다. 수도방어를 위한 첫번째 요충지인 개성에서 개성철도경찰대원 50여명이 개성역사및 부근에서 응전했으며, 감봉룡 경감 등 45명이 전사했다.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으나, 서울 이남 지방 경찰들은 각각 관할지역을 사수하면서 북한군의 남하는 지연시켰다. 7월 8일 강원영월의 화력발전소를 사수하고자 파견된 강원전투경찰대 8대대 1중대 김해수 경위 등 47명은 적과의 처철한 전투에서 24명이 전사하고 7명은 부상을 입었다. 전남 곡성에서는 곡성경찰서장 한정일 총경을 비롯한 경찰관, 의용대원으로 구성된 곡성전투경찰대 520명이 낙동강방어선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태안사 부근에 입산하여 유격전을 전개했다. 1950년 7월 29일 섬진강 상류 압록교전투에서 적 2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기갑부대를 패퇴시키는 활약을 했다. 7월 26일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낙동강 방어계획을 수립, 동서 80lm, 남북 160km의 방어선을 구축했고, 다음날 대구에서 최초로 경촬과 군이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각 도경 단위로 전투 부대를 갖췄다. 8월 18일 정부와 군 지휘부는 모두 부산으로 이동했지만 경찰만은 대구시민과 피난민을 지키기 위해 최후까지 대구를 사수하였다. 낙동강방어선에서 국군이 동부전선으로 이동하자 낙동강 서부전선 함안지구에는 전남.전북.경남 등 3개도 경찰관 6,800명이 미 제25사단과 함께 북한군 2개사단(제6사단, 제7사단)의 공격을 저지했다. 전국에서 집결한 1만 5,000여명의 경찰이 칠곡및 대구 일대에 투입되어 국군과 함께 북한군에 맞섰다.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어 연합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ㅇㄹ 시작으로 반격전을 실시하여,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이때 정예훈련을 받은 경찰(대대장 박정순 총경) 300여명은 '화랑부대'로 활동하면서 인천상륙작전및 장진호전투에서 뛰어난 전공을 올렸다. 유엔군의 계속되는 승리로 남한에 고립된 북한군이 지리산.태백산 등지에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자 군경은 1050년 12월 합동으로 백야사령부(사령관 백선엽 소장)을 창설한다. 경찰은 백야사령부 예하로 남원 전방사령부(최치환 경무관),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이성우 경무관), 지리산지구 전투경찰사령부(신상묵 경무관)를 조직하여 조선인민유격대를 토벌하였다. 여자 경찰관들도 1951년 대분산 전투대대에 편성돼 전선에 투입되는 등 단순 후방지원 업무를 떠나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경찰은 6.25전쟁중 전 경찰의 3분의 1에 해당하단 1만648명의 경찰들이 전사하여 구국경찰로서 역할을 완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