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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기는 경상남도 고성(固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20일의 회화면 배둔리(會華面背屯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구만면(九萬面)의 청년 유지인 최정주(崔正周)·최낙희(崔洛僖)·최정원(崔正元) 등과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그는 이들과 함께 한문학자 이종홍(李鍾弘)에게 독립선언서를 요약해 줄 것을 부탁해서 그것을 필사하여 밤을 이용하여 12개동리에 전달하였다. 3월 30일 오후 1시경, 나팔소리를 신호로 개천리(介川里)·마암리(馬岩里)주민들이 국천사장(菊川沙場)으로 몰려들었다. 여기서 최정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이어 허재기가 등단하여 공약삼장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시위대열은 마침 장날인 회화면 배둔리 장터로 시위행진하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헌병대는 완전무장으로 도중을 차단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시위대열이 이들에게 접근하자 헌병대가 말을 타고 시위대열로 돌진하였다. 그러나 시위대열은 나팔을 불어대며 제지선을 뚫고 배둔리 장터에 도착하였다. 이때 장터에서는 전날의 연락으로 서찬실(徐贊實)·김갑록(金甲錄)·김동기(金東琪) 등이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하였다. 이에 그는 8백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일제는 그들 재향군인의 협력까지 받으며 시위를 진압하기에 안간힘을 썼으나, 시위대열은 아무런 희생도 없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구마면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귀환즉시 대한독립동맹(大韓獨立同盟) 명의로 한인관리 퇴직권고문(韓人官吏退職勸告文)을 기초하여 이를 구마면사무소 이재홍(李在洪)에게 등사하도록 하여 각도 군에 있는 관공서에 우송하였다. 이듬해 11월 19일에는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의 밀사인 곽정곤(郭正坤)과 함께 마명면 장산리(馬名面章山里)의 허경택(許京澤)을 찾아가 군자금 10원을 모금하는 등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 7호(정치에 관한 처벌의 건)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