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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 선생은, 부산(釜山) 사람이다. 부산진보통학교(釜山鎭普通學校)와 부산공립상업학교(釜山公立商業學校)를 졸업하고 부산와사전기회사 전차차장으로 있었고 왜관(倭館)에서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던 중 1917년 6월 주인으로부터 자본금 700원을 얻어 상해로 가서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18년 6월 귀국하였다. 그는 보통학교와 상업학교 동창인 동지 최천택(崔天澤)에게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투쟁할 것을 말하고 기회를 노리던 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상해로 가서 중국 각지와 싱가폴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는 한편 여러 독립투사들과 교제하였다. 1920년 3월에 귀국하였다가 8월에 상해로 가서 김원봉을 만나 군자금 3백원을 받아 부산경찰서를 파괴하고 그 서장을 사살할 것을 계획하였다. 동년 9월 상순 폭탄을 휴대하고 상해를 떠나 동월 6일 부산에 상륙하였다. 그는 14일 오후 2시 30분에 고서보따리로 위장한 폭탄을 등에 지고 경찰서로 서장을 찾아 서장과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몇마디 환담을 한 후 고서를 꺼내는 척 하면서 폭탄을 꺼내들고 서장을 유창한 일본말로 꾸짖고 폭탄을 던져 폭발시키니 서장은 부상을 당하고 그도 중상을 입은채 붙잡혔다. 그는 모진 악형 끝에 기소되어 1920년 11월 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 언도를 받고 공소하여 1921년 2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자 다시 상고하여 1921년 3월 3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다시 사형을 언도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몹시 신음하다가 폐병까지 생겨 고통이 심하므로 '왜적(倭賊)의 손에 욕보지 않고 내손으로 죽자'하고 단식하다가 형 집행 전에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자료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