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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을 선포하고 국제공산당의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로 국회의원 50여 명을 헌 병대로 연행했다. 그리고 경찰과 군으로 국회를 포위하고 직선제 개헌안을 기립표 로 통과시켰다(발췌개헌안). 이후 자유당은 1당 독재체제 기반을 닦았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향한 도전은 계속되었다.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3선 제한 을 철폐한다”는 내용의 개헌안을 사사오입으로 통과되었다고 선언하였다(사사오입 개헌). 이승만 정권은 국민들로부터 자꾸 멀어져만 갔다. 한편 야당세력은 반이승 만 연합전선을 만들어 결집했으나 결국 분열하여 자유당의 독주를 막지 못했다. 이승만은 대통령 선거에서 총투표자의 30%의 지지를 얻은 조봉암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조봉암의 약진은 반공이데올로기와 부정선거 속에서도 민중의 잠재된 변혁 열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봉암은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사회적 민주주 의’를 사상으로 하는 진보당을 창당하였다. 이승만의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에게 진보당은 위협적 존재였다. 보수연합세력은 진보당을 철저히 견제하였다. 진보당 은 불법화되었고, 조봉암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간첩혐의로 사형 당했다. 폭력 정치가 난무하는 가운데 민중의 삶은 파탄으로 내몰렸다. 이승만 정권의 농 지개혁은 자본주의 발전을 크게 촉진시켰으나 정작 농민들에게는 불합리하게 진행 되었다. 농민들은 저곡가, 조세, 인플레이션 등으로 시달려야했고, 반면 이렇게 거 둬들인 재원은 재벌들에게 특혜로 제공되었다. 끝내살리라 |37| 1950년대 해방 공간 민중의 염원과 사회적 과제는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는 일이었다. 그러 나 민중은 이를 해결하지 못한 채 한국전쟁으로 분단은 고착화 되었다. 한국전쟁 후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기반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다. 친일 세력과 미국을 등에 업은 정권에 대한 민중의 불신을 잠재우기 위해 반공을 내세워 전 사 회를‘좌익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게 했고, 국가 폭력을 동원하여 좌익세력을 고 립시켜갔다. 이승만 정권과 민중의 대립은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의 제정을 둘러싸고 시 작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핵심세력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친일파들은 반민법 제 정을 필사적으로 제어하려 하였으나 국민들의 지지가 워낙 압도적이어서 법안 통 과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활동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반민특위 활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하면서‘국회프락치사건’을 조직하여 특위를 무 력화시키고, 반민특위를 습격, 관련자를 연행함으로써 마무리하였다. 게다가 반민 법의 공소시효를 앞당겨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이어, 이승만은 자유당을 만들어 재선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지방자치선거를 서둘러 실시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 과정에서 지방의원을 동원하여 국회 해산 데모를 조직하고, 백골단∙땃벌떼 등 폭 력조직을 끌어들여 야당의원을 위협하는 등 공포분위기를 만들었다. 부산 일원에 |36|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총 론 한국전쟁~1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