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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79년 10.26사태와 12.12 군사쿠데타, 그리고 ’80년 5.18 광주민중항쟁 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강대 1학년을 맞이하였다. 점차 현실에 눈을 뜨게 되어, 동문선배의 권유로 향린교회 대학부 모임에 참가하면서 사회모 순과 지식인의 역할 등이 담겨있는 책들을 접하게 되었고, 2학년 때는 써클‘江’ 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운동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지는 졸업정원제, 강제징집 등의 문제와 광주학살의 책임을 물으며 정권퇴진운동을 벌이던 당시에 학내 시위에 가담하면서‘요주의 운동권’으로 찍 혔다. 4학년에 들어 영장을 받았으나, 군 입대를 하루 앞둔 3월 24일 인문사회관 3층 난관에 올라서서‘학우여’를 연발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가 구속되어 감옥 살이를 하다가 ’83년 12월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전두환 정권의 학원자율화정책으로 인해‘유화국면’이 조성되고 석 방된 학생들이 복학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공동대응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동지 는 복학조치가 정권의 기만술책이라고 보고 복학을 거부한 채 노동운동을 찾아 농약 냄새가 지독한 농약을 포장하는 공장에 취직하였고, 그후에는 구로와 시흥 의 소규모 공장을 돌면서 노동자 생활을 계속하였다. ’84년부터 노동운동이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으로 발전해나가자 ’85년‘서울노 동운동연합’이 지도하는‘대나무’라는 조직에 참가하여 구로지역의 가두시위와 현장지원 투쟁을 주도하였다. 그러던 중 인천의 5.3시위가 있기 직전인 4월에 구 로에 있는‘동일기업’에 입사하여 6월에 노조결성을 주도하다가 두 번째 구속을 당하였고, ’87년 6월 항쟁이 불붙던 시기에 출소하여 쉴 틈 없이 거리로 나가 시 위 물결에 합류했다. 이후 양평동에 위치한 플라스틱 공단 내 종이박스를 만드는 한 회사에 입사한 동지는 ’88년 6월경 공장이 파산직전에 이르러 공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민주노동자연합’기관지「민주노동」을 발간하는 일을 도우면서 영등포∙구 로지역의 노동자들로 구성된 서울남부지역금속노동조합에 참가하는 한편, 11월 에는 문래동에 위치한 소규모 철공장에 취업했다. 그러나 ’90년 1월 공장에서 무 거운 철을 들다가 허리를 다쳐 공장에 다닐 수 없게 되자‘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연구소’에 나가 제3세계 노동운동을 비롯한 국제문제를 연구했다. 그 리고 ’90년 가을에는 ’민족민주운동연구소‘에 참가하여 노동분과를 이끌었고, ’91년부터‘한노련’에서 다시 일하게 되었다. 그 후 동지는늦은나이에 결혼하여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하던 중‘위암’이라는 선고를받고, 대수술을받았으나결국못다이룬꿈을남긴채운명하고말았다. 김상옥(당시33세)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61년 1월 7일 서울 출생 1980년 서강대 문과대 입학 1983년 서강대 민주화 시위 주도로 구속 1985년 서울노동운동연합의 대중모임‘대나무’에서 활동 1986년 구로 동일기업 노조설립 투쟁으로 구속 1988년 한국민주노동자연합 편집위원 1990년 민족민주운동연구소 노동분과 국제분과 연구원 1991년 서강대 민주동문회 사무국장 1992년~1993년 한국민주노동자연합 홍보부장 1994년 2월 19일 위암으로 운명 끝내살리라 |37| |36|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김영삼정권 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