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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을 정복 서울을 향하여 공주까지 진격하였으나 한일연합군에 패하여 전봉준, 김홍기, 김개남은 체포되여 참수를 당하고 선생은 최승우, 최유하, 김학원, 최동필등과 순창 회문산에서 6년여의 세월을 은피하시다. 1910년 경술국치후에는 실국의 울분을 참지못하고 절치부심 왜정에 항거 호적등재 거부운동을 선동하였으며 망국의 무주민임을 통탄하시다. 1917년 정미년 선생은 62ㅅ게의 노령으로 천도교 임실교구장에 취임 교인들을 규합 태동하는 기미 3.1운동거사에 대비하시고 1918년 12월말 거사 모의를 위하여 전주시 고사동 이군필가에 각군 대표자회의에 임실대표로 최승우, 김영원, 강계대, 박성근, 우성오등과 참석 사전계획을 수립하시고 1919년 기미 3.1운동시에는 서울로 부터 전달된 독립선언서를 각면에 배전 거사를 시달 자정을 기하여 임실군 각지역및 요소에 배포및 게시케하고 당일에는 군중을 선두지휘 독립만세를 고창하시다가 왜경에 체포되여 전로로 송치 연일 가혹한 고문으로 시역고문에 못이겨 거사동지들의 성명을 자백할까 우려 3월 7일 심야에 단설불언하시고 왜경이 필서자백을 강요하매 동월 9일 자정에 열의작승결항 자결하시다. 선생의 유해는 운암면 지천리 사당치에 안장하였으나 후사가 없어 이손이 수호하다가 외손사망후에는 지천리민의 추모지성으로 년년히 수전하여오다 우금 다행히 지방유지및 지천리민들의 정성과 정부의 특별지원으로 묘역을 광수하고 수석을 벌석각문을 청하기에 선생의 유적을 갑오 동학사, 3.1운동사, 천도교사, 임실군사, 임실3.1동산 운암면 상운리 갑오동학, 기미3.1운동기념비, 운암면 선거리 선생과 김영원 선열 의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