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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 장공 약전
공의 이름은 발이요 자는 자고이다. 관향은 경주요 군수 명선의 아들로 일천오백오십삼년 시월 스무닷샛날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경서와 병서에 능통하였으며 성품이 과묵하고 풍모가 의연하여 무장의 기풍을 갖추고 있었다. 스무다섯살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라 선전관을 지내고 해남 현감으로 나갔다가 종성으로 가 북방의 병환을 평정하고 거제 현령이 되었다. 비변사의 낭관으로 병조의 무비사랑직을 겸하다가 다시 위원군수로 나갔다. 임기를 마친 후 훈련원의 부정이 되었으며 사복서의 정으로 옮겨 내승을 겸하였다. 이때 왜에 대한 근심이 있는지라 조정에서는 이를 염려하여 공을 당상관의 절충장군으로 벼슬을 올려 부산진주군첨절제사로 임명하였다. 공은 부임하자 성을 수축하고 전구를 갖추며 군사를 조련하여 방비를 굳게 하였다. 일천오백구십이년 사월 열사흗날 왜적이 부산포로 내습하자 공은 바다에 나아가 항전하였으며 성에 들어와서는 수성준비를 가다듬는 한편 군민들을 진정시켰다. 열나흗날 적은 성을 포위하여 총을 발사함이 비와 같은데 공은 휘하를 격려하여 적을 수없이 죽여서 시체가 세 군데나 산더미 같이 쌓이게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는 화살이 다하여 부하장수의 피하자는 권유도 일축하고 분전을 거듭하다 장렬히 순사하니 때에 공의 나이 마흔이었다. 공의 충의에 감격한 모든 성민들도 최후까지 항전을 계속하여 성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 일천오백구십사년에는 자헌대부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일천육백팔십육년에는 환란 중에도 나라를 잊지 않음은 충이요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음은 장이라 하여 충장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일천육백팔십일년에는 숭정대부의정부 좌찬성에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게하는 높은 벼슬로 가증되었다. 한편 난이 끝난 후 사우와 단묘에서는 그 충절을 기리는 제향이 끊이지 않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