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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순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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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종사하였다. 공은 천성이 강직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직언 잘하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다. 일본은 조선을 망하게 하고 일본인은 조선에 가서 관리로 호강하고 조선인은 일본에 와서 노동자로 고생한다 하고 불평하니 한모는 항일정신이 강한 청년이라 요시찰인물이다 하더니 드디어 경부경찰서 고등계에 연행 수감하여 1940년 10월부터 익년 8월까지 1년 간은 영어의 몸이 되었다. 그동안 경부와 대판 구주에 사는 조선인의 항일 및 독립운동실태를 밝히라고 많은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친형의 구명운동으로 출옥은 되었으나 옥고로 쇠약한 몸은 지탱할 길 없어 반년 후에 귀국하였으니 거의 폐인이 되고 말았다. 투병생활 끝에 그리던 조국광복이 왔다. 대구에 항일운동인의 모임이 있다 하여 달려가 보니 일제에 아부하던 친일파가 우글거리는지라 바로 돌아와서 다시는 그런 자리에 참석 않기로 하였다. 옥중에서 익힌 염색기술로 선산읍리문리 네거리에서 의복염색을 생업으로 삼고 살아가며 뼈에 사무친 망국의 한을 잊지 못하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항일운동을 하고 싶다고 하였다. 1978년 음력 9월 5일에 영면하니 향년 69세이다. 슬하에 5남을 두었는데 장남 종수가 조국이 차단되어 생사를 알 수 없고 차남 흥수는 6.25 동란으로 사망하고 3남 익주 4남 해수 5남 명수가 뜻을 모아 부친의 애국정신을 후손에게 전하기 위하여 추념비를 세우게 되었다. 난시에 충신이 나온다더니 망국의 통한 속에 수많은 애국자가 나왔다. 그 중에는 공이 크고 이름이 덜 난 이가 있으나 큰 공이 없고 이름없으 나라 잃은 통한 속에 애끓던 생애를 마치신 분이 얼마나 많았으랴. 한공 또한 그 한 사람이리라. 공의 종마리 명수에게 이 글을 읽어주며 공이 살다간 가시밭길을 추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