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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당초문대가 덕흥리 것에 비해 좀더 단순화되고 선이 가늘다는 점이 두드러진 차이 라 할 수 있다. 15세기 초의 박익 묘와 408년에 축조된 덕흥리 벽화고분의 당초문대가 어떤 연유로 친연성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으나 그 형태상의 상 호 유사성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앞으로 새로운 자료의 출현을 기대해 보는 수밖에 없 다고 생각된다. 하단의 벽돌무늬는 지면과 벽면 혹은 지하세계와 현실세계를 구분짓는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윗쪽의 경계선이 당초문대의 외선(外線)들처럼 굵고 내선들은 훨씬 가늘다. 전반적으로 선들이 제법 날차롭고 숙달된 솜씨를 보여준다. 남벽과 동서벽의 선들이 보여 주듯이 변화가 적지 않음을 보변 먹줄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자 같은 것을 사용하여 손으로 붓을 잡고 그은 것이 확실시 된다. 이와 유사한 벽돌무늬는 고구려의 수산라(水山里) 벽화고분에서 찾이-볼 수 있는데 그 고분에서는 같은 벽면의 상단과 하단을 구분짓는데 사용되었고 백면과 흑면을 대 조시키고 있는 점이 박익 묘의 것과 구분되는 차이라 할 수 있다(圖7).6) 지면과 벽면 을 구분짓기 위해 벽돌무늬를 그려 넣은 것은 박익 묘에서만 볼 수 있는 특정이 아닐 까 생각된다. 그런데 동벽과 서벽의 인물들은 모두 병이나 잣잔 등의 그릇, 신발, 모자, 주판(朱 *찌, 당(I~훨 등 기물들을 들고 예외없이 북쪽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다(圖2,3). 왜 이들이 모두 한결같이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기물들을 든 채 옮겨가고 있는 것일 까 동의 의문이 든다 이들이 북쪽을 향하는 이유는 아마도 북벽에 묘주인 박익의 초 상이나 박익의 부부병좌상(夫歸파坐像)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 화를 참고한다면 덕흥리 벽화고분, 약수리 벽화고분(藥水里뿔畵古慣), 매산리사신총(梅 山里四神챙긴, 쌍영총(쩌깜챙긴, 각저총(角拖劇 등 5세기 고분에는 현실(玄室)의 북쪽 벽 에 묘주의 단독 초상이나 부부병좌상을 그려넣는 것이 관례였다 7) 15세기초의 박익 묘 를 5세기의 고구려 고분벽화와 연관짓는 것이 또한 무리일 수 있으나 당초문대의 경우 에서처럼 불가사의하게도 친연성이 엿보이고 있어서 참고하는 것 자체가 무익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은 도굴로 인하여 완전히 박락된 북벽에는 아마도 박익의 단독상이나 부부병좌상이 그려져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된다. 합장 6) r북한의 문화재와 문화유적J 1, 圖238참조. 7) 안휘준, r한국 회화사 연구J (시공사, 2α)()), pp.48 -70참조, 1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