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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박진 전투 경과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차를 앞세우고 기습 남침한 북한 공산군은 일거에 38선을 돌파하여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한강을 넘어 산으로 침공을 계속하였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힘을 모아 혈전을 거듭하면서 이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군사력이 열세하여 눈물을 머금과 후퇴를 계속하다가 개전 40여 일이 경과한 8월초에는 마침내 낙동강을 끼고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에 더 물러설 곳도 없는 절박한 상황하에서 왜관-상주-영덕을 연하는 전선은 국군이, 현풍-창녕-진동을 연하는 전선은 유엔군이 방어하게 되었다.
이곳 박진지역은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낙동강을 도하하여 최후의 발악을 하던 북한공산군과 미군이 2주간 사투를 벌렸던 격전지이다. 당시 북한의 최정에 부대인 제4사단이 8월 5일 야간에 이목 나루터를 이용, 은밀히 기습 침투하므로 강변을 방어하고 있던 미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8월 11일에는 영산읍까지 침공에 성공하였다. 북한 공산군은 일거에 부산을 함락시키기 위해 박진 나루터에 가마니 등으로 수중교를 만들어 각종 차량과 병력 등 주력을 투입시킴으로써,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따라서 유엔군은 대구, 마산 등지에 있던 전 예비병력을 이곳으로 집중시킴으로써 시남리, 대봉리, 성사리에서 국운이 걸린 대 혈전이 전개되었고, 마침내 8월 19일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적을 강 건너로 완전 격퇴시켰다. 이 전투의 승리로 전세가 역전되어 아군이 낙동강을 건너 반격하게 되었으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전사에 길이 빛날 중요한 전적지이다.
머나먼 이국 땅 이곳에 자유를 위해 산화한 수많은 젊은 영령들에게 우리들은 충심으로 그대들의 명복을 빌면서 그대들이 피 흘려 지킨 이땅에 다시는 전쟁의 참화가 없도록 자유 수호의 결의와 어울러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울 것을 굳게 다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