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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의 독립선언에 적극 찬동하여 탑골공원 만세운동에 참여하시고 경주지역 유지들과 상의하여 동지들을 규합하고 천도교본부와 협의하여 낙생 돌마 대왕 중대 등 각면의 시위일정을 조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 배포하고 1919년 3월 26일 저녁 율리 주민 100여명과 모단봉에서 봉화를 밤새 올려 시위를 알리고 27일 10시경에는 지역주민 3천여명을 분당장터로 집결 28일 29일 저녁까지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각면 각리를 돌면서 시위를 하셨다. 공은 광주만세운동주도자로 일제에게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1년 여의 옥고를 치르셨다. 공은 법원판결에 불복하고 "나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기인한 정당한 의사발동이므로 범죄가 아니다 그러므로 1심 2심에서의 유죄 판결은 부당한 것이며 복종할 수 없는 위법임으로 상고한다"고 항변하셨다. 공은 출옥 후 농민회를 조직하여 농민운동을 하셨으며 전답을 팔아 독립운동자금 지원을 하셨고 1927년에는 신간회 광주지회를 창립하여 임원으로 활동하셨다. 공은 선현들의 전적을 상고하여 민족정기와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용인 충렬서원 및 심곡서원과 광주향교 등에도 적극 참여하셨으며 물산장려운동도 전개하셨다. 공은 1937부터 4년간 문중 친지들과 협력하여 전국의 문정공 후손들을 찾가 모선사상과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문정공의 재실인 영묘제를 중창하고 전적을 구입하고 서당을 열어 젊은이들을 가르치셨다. 공은 숙환으로 1950년 음 9월 8일 향년 70세로 졸하시니 영장산 서록 서평릉 안 청룡간좌에 모셨다. 대한민국 정부는 공의 독립운동과 애국활동의 공적을 높이 기리어 1990년 8월 15일건국훈장 애족장(제 177호)를 추서하였다. 공은 22세에 평택후인희선대부겸 오위장 임승회의 차녀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