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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 가평의 얼과 인맥 우리 전의(全義)이씨(李民)는 고려 태사(太師)이시고 이름을 도(掉)로 부르는 분의 후예 로 본조에 들어와서 청강(淸江)선생으로 부르는 이름이 제신(濟닮) 서화국상으로 이름은 행원(行遠), 고조부의 이름은 덕린(德짧~), 금산(鎬山)군수(君6守)로 이조(更暫)참의(參議)에 증직되고, 증조(曾祖)의 이름은 영배(永倍), 황주(黃州)목사(收使), 증(觸) 이조(更훨)참판(參 判), 조부의 이름은 문회(文會), 호는 포헌(훗빡)이요, 이조(更團)참판(參判), 증(觸) 이조(更 훨)판서(判書) , 아버지의 이름은 현서(玄總í), 호는 성영(星홍) 관명은 대종백(大宗伯) 문학 (文學)정사(政事)로 세상의 추위가 중요하였다 어머니는 증(觸) 정부인(貞夫人) 창영(昌寧) 조씨로 이조참판, 이름은 윤수(允途)의 딸이요 계모는 정부인(貞夫人) 전주(全州) 이씨, 지숙(址챔홉)의 딸이다. 부군(府君)께서 순조(純祖) 병 자년 11월 31일에 어머니 조(曺)부인에서 출생하니, 조부 참판공이 손자를 안고서 기뻐하기 를 이 아이가 장차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내라고 하였다. 무자(영子)년에 부군(府君)이 몸이 불편하여 모시고 있는 사람이 탕약을 드리는데 꿈에 판서공(判뿔公)이 부군을 안고 가는 것 을 보았는데, 그 이튿날에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해에 어머니가 작고 하셨다 헌종(憲宗) 갑진(甲辰)년에 사마(司馬)시험에 합격 철종(哲宗) 임자(王子)년에 문과에 올라 예괴원(禮塊院)의 추천으로 승정원(承政院) 주서(主똘) ,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사간원(늠 課院) 정언(正름),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수찬(修擺),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겸 선전 관(宣傳官) , 장악원정(掌樂院1E) 벽어영(밟倒l營) 종사관(從事官), 신유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숭지(承듭) 보좌(補住)역임(歷任), 형조(꺼費)참의(參議), 임술(王或) 년에 판서공이 작고, 병 인년에 이조참의, 돈영부(敎寧府) 도정(都正) , 정묘 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 공조( 뽑) 병 조(兵費) 형조(제뽑), 이조(更홈)참판(參判) 역 임 (歷任), 한성부 좌윤(左尹), 우윤(右尹) 겸 동지(同知) 경연(經鐘) 춘추관(春秋館) , 의금부사(義禁府使) 도총부(都抱‘府) 부총관(副fi침 管), 경오 년에 계모(繼母) 이부인 상사, 계유년에 승진, 자헌대부(資憲大夫) , 형조, 예조판서 역임,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의정부 좌참찬(左參贊), 별 행정사 겸 지경연(知經鐘) 춘추관(春秋館) 의금부(義禁府) 중추부사(中樞府使). 동지(同知) 성 균관사(成均館事) 도총부(都抱‘府) 도총관(都總管), 의정부(議政府) 유사(有司) 당상(堂上), 병 자년에 황해감사로 선정을 베풀어 23주에서 송덕비를 세웠다. 옮기어 경상감사를 역임, 대 신들이 특히 임자를 추천하였는데, 4년 만에 돌아와서 주상을 인견하니, 상이 문무의 공적을 칭찬하고 물러갈 것을 명령하고 사람을 시켜 부축하여, 궁전을 내려가게 하니, 특별한 대우 였다. 신사 년에 이조판서, 홍문관 예문관 제학(提學) 경리(經理) 예리(說理), 기무아문사(機 務衝門훤) 겸 남전운감주원(南願雲藍廣院) 제거(提學) 임오년 봄에 와병(떼病)으로 고향에 돌아와서 있었는데, 군사변란이 일어나서 서울로 빨리 들어와, 8월 5일에 생을 마치니, 수명 은 67세였다.9월에 양근(楊根) 북면 장석촌에 장사를 지내니 이 곳은 부군이 생존 시에 자주 돌아보는 곳이다 아 슬프다, 부군이 약관의 나이로, 세상의 중밍-을 얻었다고 자부하였으나, 조실부모하니 애통하는 심정으로 판서공을 지성으로 공경하고 어머니 이 부인을 받들어서 가사의 대소 모든 일을 자의로 하지 않고 어머니에게 품하였고, 상사(喪훤)에 지나치게 슬퍼 하여 건강을 해칠 지경이었다. 한 사람의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일찍이 과수가 되고 가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