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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이송 된 후 모진 고초를 당한 끝에 1894.12.27 처형을 당하였다. 장현의 둘째 15세의 원식이 체포 당시 나주 처형장까지 따라가 불더미 속에서 시신을 수습하였다. 1894년 4월의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말기 60여년 동안 어린 임금의 외척 세력들이 실권을 잡고 매관매직과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 등 부정부패로 인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가 없었고 평등사상, 척양척왜, 사람을 하늘처럼 여기는 동학사상이 널리 퍼져서 봉건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며 봉기했다. 삼의사가 참여한 농민군은 황토현과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에 맞서 승리하였고 그 여세로 전주성을 점령하여 전주화약 12 조항과 집강소 설치를 약속받고 청국군과 일본군대의 파병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하여 해산하였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잘못된 제도의 개선보다는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청국군 파병을 요청하였고 파병 요청이 없는 일본군도 뒤따라 들어와 6월 경복궁을 점령한 후 친일정권을 세워 국권을 침탈했다. 9월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전국에서 300여만명이 참여한 2차 봉기가 일어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분군은 관군과 합세하여 신식 무기로 동학농민혁명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으며 약 30여만명을 살상하였다. 1894.12.22 순무선봉진 등록에 의하면 접주 문빈(장현)은 1894.11월 고부 부민 황경이 소유의 도조를 받기위하여 해제에 온 영촌면 비화등 합준상이 도조를 받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등 가난한 농민의 대변자로 약자를 침해하는 꼴을 보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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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동학농민혁명 재봉기의 방지를 위해서 동학농민혁명군의 거괴(우두머리)를 잡으면 나주 토벌대본부로 압송하라고 각 현에 명령을 내렸고(1894.12.10 일본사관함) 1895.1 양호우선봉일기 권4에 최기현, 최문빈(장현). 최이현(선현)을 접주로 기록하고 있으며 각 지역에서 잡혀온 거괴 73명과 함께 나주의 일본군 진영에서 쏘아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의사의 죽음은 봉건제도 개혁과 나라를 위한 값진 희생이었다. 그러고도 패가망신을 당하는 수모을 겪었으나 해주최씨 후손들은 조상들의 애국정신을 열심히 교육하였고 생활이 어려웠을 때도 일본인에게는 전답을 팔지 않았으며 일제 강점기때는 마을에서 농악놀이를 하는것을 극구반대하였다. 삼의사가 유언처럼 남긴 차당피당불입당(此黨疲黨不入黨)은 동학농민혁명의 피해가 얼마나 큰것인지를 알 수 있다. 후손들은 1973년 동학농민혁명 참여 해주최씨 삼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