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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차려 참모를 두고 황점에 경원택 내구에 이규현 양지에 문언조 심동에 안진태 산수에 고제두 병곡에 진병삼등을 배치하여 병력 군수 정보에 관한 강력한 전투체제를 갖추였다. 유격장 하거명은 아장 박화기화 함께 정예병사 유춘일 김권원 임구희 박수기 하일청 김영삼 임찬일 일일종 강옥성 박문규 박정규 조순집 이순갑등 인솔하여 산속에 막사를짓고 수시로 출몰하여 적을 습격 많은 전과를 거두었고 후군장 김성진은 박민기 조두식 신성규 조성의 김순배 임학규 이규일 전조석 장춘기 송군필등에게 무술을 교련하고 전방과 호응하여 임기응변의 활동을 하였다. 또 군수감 김현수는 김환제 이준호 조성필 서환식 김군백 조성목등으로 군량과 무기 탄약을 포집 제조 조달케 하였다. 그리고 감찰 이석길은 마을앞에 주막을 차려 왕래인을 살피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대개 나기숙 오지선 이인호의 책임으로 후군이 담당하였으니 월성은 실로 남방의병의 기지가 되였다. 이해 9월에는 호서의병과 합세하여 장수 싸움에서 왜적10명을 사살하고 무주 고창골에서도 수십명을 죽여 개가를 올렸다. 1907년 거창읍에 주둔한 적을 습격하여 임구희는 전사하였고 1908년 유명한 구천동전투에서는 호서및 덕유산의병과 연합전선을 펴여 적200여명을 포위 섬멸하였으나 하거명 김권원이 장렬히 전사하였으며 병사들의 부상도 적지 않았다. 동년 9월 삿갓골싸움에서 적 7명을 또 죽였으나 10월 박화기 박주기 유춘일이 장수 계북 양악에서 전사하였다. 1909년 10월 적의 밀정 최곰의 밀고로 하일청도 피살되였으니 후군은 밀정을 색출하여 1910년 3월 남산들판에서 처단하였다. 이해 통분의 한일합병이 이루어진후로 선생과 의사들은 전술을 바꾸어 항쟁을 계속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