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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생종(夫生鍾, 1909-1936)은 1928년 조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와 오사카 등지에서 노동을 하면서 열악한 노동 조건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조선인들을 보면서 민족주의 의식이 싹텄다. 귀국 후 장사를 하면서 제주청년동맹 함덕지부에 가입하여 항일 운동을 벌였다. 1931년 1월 제주도에서 김일준과 함께 항일운동가 한영섭의 장례식 때 공산주의를 강조한 만장을 게양하고 적기가(赤旗歌)를 합창하였으며, 또한 고향의 거리에 추모비를 세웠다. 이 사건으로 1931년 12월 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33년 4월에는 혁명적 함덕농민조합협의회를 결성에 참여하여 직선전부를 맡아 활동했다. 1934년 8월에 혁명적 농민조합 창립 운동으로 제주경찰서에 총 62명이 입건되었다. 이중 김두경·부병훈·김경봉·양병시·장한호·김정맹·양두옥·홍경옥·장용진·장병윤·강공흡·김일준·부생종·부병준·김원근·이기표 등 16명은「치안유지법」위반으로 기소되었고, 장창구 등 35명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으며 고자화 등 10명은 소재가 불명확하여 기소중지 처분이 내려졌다.기소된 16명은 목포로 이송되었는데, 1937년 4월 12일에 가서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재판이 종결되었다. 당시 이들 운동가들에 대해 일제는 가혹한 고문을 가했으며 부생종 역시 예심 과정에서 취조를 받다가 1936년 6월 29일 목포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