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page


175page

獻詩(헌시) 우리 역사와 함께 영원하라 오늘, 우리는 하동 항일독립운동 사적지 동광(東光)의 언덕에서, 옷깃을 여미나니 그날 피맺힌 외침과 함성, 태극기 물결 속에 들리도다. - 나라가 없으면 나도 없는 것. 침략자 종말에 맞서 오로지 구국(救國)의 일념(一念), 호국 영령이시여, 순국선열이시여. 조국과 겨레,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혼의 푸른 충절이 아니겠는가. 민족 정기·민족 기상·민족 기개 여기 새긴 이름마다 우리 역사와 함께 영원하라 - 호국 영령이시여, 순국선열이시여. 2013년 3월 1일 삼가 정두수 바침
175page

獻詞(헌사) 1945년 8월 15일, 日帝(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祖國光復(조국광복)이 되어 36년간의 의 역사를 박차고 일어섰던 그 때의 감격이 歲月(세월)의 흐름 속에서 절차 잊혀져가고 있는 現室(현실)이다. 우리가 祖國(조국)을 되찾아 政府樹立(정부수립)을 하고 민주정치와 경제를 發展(발전)시킨 것은 광복을 위해 生命(생명)을 바치고 투쟁한 先烈(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이 그 原動力(원동력)이였을 어찌 잊어서 되겠는가. 이에 여러 河東(하동)의 뜻있는 분들이 河東人(하동인)의 애국정신과, 하동인의 不屈(불굴)의 정열과, 하동인의 高貴(고귀)한 희생을 자손만대의 龜鑑(귀감)으로 삼고자 李洙鍾(이주종) 회장을 앞세워 이곳에 하동독립공원을 造成(조성)하는 일은 靑史(청사)에 빛나고 後代(후대)에 길이 남을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돌이켜 보건대, 조국 위해 목숨 바친 先烈(선열)과 피땀 흘리신 志士(지사)님들의 희생은 참으로 위대하셨나니, 여기 光復(광복)의 빛 다시 밝히며 連綿(연면)이 이어질 河東人(하동인)의 항일독립정신에 머리 숙여 獻詞(헌사)를 봉헌하나이다. 2013년 3월 1일 光復會長(광복회장) 朴维徹(박유철)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백암 박은식의 손자)
175page

慶祝辭(경축사) 섬진강 물굽이가 남해바다에 다다르면서 하동 땅에 그 영기를 스며들게 하였기 때문인가. 백두대간의 우람찬 맥이 하동 땅에 이르러 반도의 정기가 하동 땅에 응축되었음인가. 이 명기와 정기가 하동인의 정기가 되고 정신이 되었기에 예부터 이곳엔 제제다사의 인걸이 줄을 이어 태어났음이 아닌가. 특히 나라를 빼앗겨 수난이 혹심할 때 하동인은 재산의 수탈, 신변의 위해를 무릅쓰고 분연히 침탈자 일제에 대결하여 항거하였다. 1919년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대한독립을 선언하기 위해 김규식 선생을 민족대표로 파견할 때 전국 137명의 파리장서(巴里長書) 서명자 중 하동인도 참여하였다. 또한 1894년 동학농민항쟁의 최후의 전장이었던 한(恨) 맺힌 현장인 고성산(高城山) 하동에 위치한다. 특히 독립운동 서훈자만도 현재 50여명에 이르고 있음은 하동인의 명예요 자긍심이다. 하동에는 1919. 3. 18일 하동장날을 기하여 대한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12인이 서명한 하동의 독자적인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원본도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있어 당시 지방독립운동의 중요한 사료이다. 하동항일청년회를 중심으로 하동열혈청년들의 지속적인 항거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특히 타 지역에서는 당시의 청년회관은 흔적도 찾기 어려운데 이를 관리 보존하고 있는 사실만도 하동인을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하동 땅의 독립운동의 역사를 간추려 청년회관 튀 편 언덕에 하동인의 정기를 발양하고 정신을 우뚝 세워 영원히 하동인의 긍지와 심주가 되도록 하동독립공원을 조성하는 일은 매우 뜻 깊은 일이며 장한 일이다. 하동이여 영원히 발전하라! 하동인이여 애국 애향의 정신을 영원히 기리길 바란다. 축원하는 마음을 드리게 되는 본인에게는 한없는 영예가 아닐 수 없다. 2013년 3월 1일 李鍾贊(이종찬) 드림 (조부 6형제 망명독립투쟁가족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