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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고종 계미 8월 12일 출생하셨다. 공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용모와 기상이 호락하고 단아하였으며 너그럽고 겸손하였다. 어려서는 학문을 좋아하였고 행실은 효우에 바탕을 두었으며 재조는 세상의 쓰임에 합당하였더라. 성장하여가매 원대한 포부를 안고 상경하여 측량학을 공부하고 경기도 측량기사 지별감사로 근무하시던 중 치욕적인 제2차 한일조약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많은 애국지사들이 고국을 등지고 중국으로 미주로 또는 노령으로 망명하였다. 일제는 한국민족의 분노와 설움을 폭발시켜 마침내 3.1운동의 거족적 봉기로 확산되었고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학살 체포 구금되었다. 이 만행을 세게에 알리고저 육당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의암 손병희를 주로 한 민족대표 33인은 인사동 명월관에 집합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만해 한용운이 선언서를 낭독 만세를 부른 후 경찰에 통고 자진해서 체포되었다. 한편 수만 군중과 학생들 약 5천 여 명은 탑동공원에 모여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후 공원을 나와 종로 거리를 누비며 대한문 남대문을 지나 왜성기까지 시위행진하였다. 공도 이에 합세하였더라. 그리고 고향인 양주로 나려가서도 이장으로 있는 아우 종규와 주동이 되어 동지인 조필선 김대현 이사범 들과 동년 3월 27일 밤 많은 동민들이 운집한 자리에서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해야만 살 수 있다」고 선언하고 열렬히 만세를 부르고 시위하였다. 다음날 3월 28일 다시 백석면 오산리 대들벌에 모여든 면민 6백여명과 만세를 부르며 백석면사무소까지 시위행진하였다. 이때에 공은 왜경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당시의 경기지방법원 형사법정에서 1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시다. 병세가 악화되여 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으시다. 서기 1920년 7월 14일 운명하셨으니 향년 37세였더라. 노부모를 뫼신 시하의 몸으로 먼저 세상을 뜨셨으니 기 심경 어떠하셨으리오. 지금까지 공의 의적이 가리워져오다 서기 1990년 8월 15일부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장지는 양주군 광적면 비암리 전진바위 선영 하 양좌원이다. 비는 파평윤씨로 춘영의 따님이시다. 서기 1881년 7월 23일 출생 서기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