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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관(당시29세) 용인 천주교묘지에 안장 1962년 서울 출생 1981년 서울 한성고등학교 졸업 1981년 고려대학교 사학과 입학 1983년 학내시위 주도로 장기간 수배 1984년 학원 자율화 조치로 재입학 1985년 고려대 졸업 1987년 인천 신흥목재(우아미 가구)에서 활동 중 해고 1989년 인천 목재 노동자회 실무자로 활동 1990년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회원으로 활동, 남부 노동반 반장 ‘인사연’제8차 정기총회 준비위원 1991년 6월 27일 운명 |346|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노태우정권 노동 동지의 삶과 죽음 ’84년 학원자율화조치로 수배 해제되어 학회건설에 노력하던 동지는 사회변혁 을 이루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역량강화가 절실히 요구되며, 젊은 지식인으로서 이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노동현장에 뛰어든다. 당시 동지는 구로 지역을 거쳐 인천으로 가게 되고, 주로 목재단지 근처에 방을 얻어 동료들과 함 께 생활하기 시작한다. 목재 노동자회와 인노회, 인사련의 활동을 통해 이 사회 의 민주주의와 통일 그리고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는 활동을 앞장서 서 전개하였다. 그 후 ’91년 6월, 사상 유례 없는 금권, 관권선거로 민자당이 압승한 광역선거 이후 노태우정권은 폭압적인 공안통치를 노골적으로 저지르고 있었다. 인천 동서 식품에 1천여명의 경찰을 투입하여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하였고, 안산의 동영 알루미늄에는 4백여명의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해산시켰다. 또한 26일 인하 대 총학생회장이 교내에서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되었고, 27일에는 인천대에 160 여명의 백골단이 투입되어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강제 연행하던 중, 학생들에게 중상을 입히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엄혹한 시기인 ’91년 6월 27일 1시경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에서 정기 총회를 준비하던 동지는 새벽 1시 50분경 인천대 공권력 투입소식을 접하고, ‘인 사련’도 침탈당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그럴 경우 총회자료가 압수당하게 되 고 조직에 대한 큰 타격이 예상되어 이를 막으려 급히 사무실을 나오다가 3층 유 리창을 열고 뛰어내렸으나, 실족하여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급히 병원으로 옮 기던 중 운명하였다. 끝내살리라 |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