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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살리라 |343| 위원 내정을 완료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도 국회가 열리지 않아 위원 임명동의안이 처 리되지 못해 의문사위 출범은 10월 17일에야 할 수 있었다. 3.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출범과 이어지는 법개정 투쟁 3-1. 제1기 위원회, 닻은 올랐으나… 닻은 올랐다. 의문사 유가족 등은 배가 목적지까지 제대로 가 주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위원회 출범을 지켜봤다. 위원회 구성과 교육 등을 마치고 본격적인 조사 활동은 2001년 도부터나 할 수 있었다. 위원회는 처음으로 구성되는 민간합동기구였기에 모든 것이 실험 이었다. 더욱이 과거에 쫓고 쫓기던 관계였던 민주화운동 경력자들과 국정원, 기무사, 검 찰, 경찰 등 수사기관에서 파견 나온 조사관들이 한 배를 타고 노를 저어가야 하는 기구 81) 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 모두는 민간 출신이건 파견 공무원이건 누구나 할 것 없 이 처음 해 보는 경험이었다. 서로의 생리를 잘 알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동안 생소 했고 그리고 서로를 경계하였다. 대부분의 경우는 잠복해 있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직∙간 접적인 힘의 대결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제일 먼저 드러난 대립은‘민주화운동’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의 문제였다. 파견공무원들은 이 문제를 아주 엄격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82) 반면에 민간출신 조사관들은 가능한 확대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 제는 사건 결정시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논란이 계속되자 위원회는 조사관들에게 보고 |342|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과가 서무팀과 운영팀으로 11명, 조사과는 2개팀 7명으로 되어 있었다. 조사과에서 과장을 빼면 1개 팀당 3명씩의 조사관들이 배치되는 체계였다. 어찌 보면 이렇게 조직체계를 구성 하겠는 것이 당연해 보일 수도 있는 문제였다. 법에 주어진 권한이나 기간으로는 국민고충 처리위원회와 같은 성격의 기구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의문사 사건 진정만 받고 가능한 범 위 내에서 조사한 뒤 관계기관으로 이첩하는 절차를 밟으면 된다는 사고를 한 것이다. 이 렇게 의문사 진상규명에 대해 엄청난 인식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서로 다른 언어 로 대화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문제는 그 이후에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조사 범위나 권한 등과 관련하여서도 법제처 담당 직원과 대화할 때에는 가능한 부분이 있다고 수긍하 였는데, 막상 행정지원단은 요지부동이었고, 위원장을 장관급으로 하는 문제도 국민고충 처리위원회 79) 와 같은 성격의 기관으로 여겼기에 장관급으로 할 필요가 없으며, 제보자에 대한 보상도 500만원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위원회 사무실도 직원 수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구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였음에도 덜컥 비싼 임대료를 지불하면서 작은 평수 를 구하여 위원회 출범 이후 조사실 등의 부족으로 두고두고 곤란을 겪게 되었다. 이렇게 행정지원단과 시행령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법 시행일을 넘기게 되자, 행자부 에 최후통첩을 하고 정부중앙청사 후문 앞에서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올바른‘의문사진 상규명에관한특별법시행령’제정을 요구하며 노숙 농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노숙농성을 진행하면서 행정자치부 차관을 만나 가닥을 잡게 되었다. 당시 행정자치부 차관은 조사관 수와 관련하여 처음에는 50명으로 출발하였다가 부족하면 이후에 충원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80) 우여곡절 끝에 2000년 6월 30일 시행령 안이 합의되어 7월 10일 공포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문제는 시행령 제정에만 있지 않았다. 년 초부터 위원 추천과 이를 맡아 달라고 각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접촉을 하였지만 선뜻 이를 수락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렵게 수락 을 받은 인사에 대해 청와대에서 거부 의사를 나타내 한꺼번에 물거품이 될 상황이 발생하 였다. 의문사 유가족 등은 청와대 앞에서 이를 항의하는 일인시위를 사흘간동안 벌인 끝에 79) 국민고충처리위원회는 상설기관이나 위원회는 9개월짜리 한시기구임 80) 그는 서면으로라도 이를 약속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위원회 출범이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81) 이와 관련하여 2000.12.1자 국민일보‘여의나루’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한 지붕 두 가족’의문사규명위 제하의 기사에서“10 여년전 극과 극의 위치에서 수배자와 수사관으로 맞붙었던‘왕년의 맞수’가 의문사 진상조사를 위한 민∙관 조사관으로서 앞으로 같이 활동한다. 1일 임명장을 받고 공식 활동에 들어갈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민∙관 합동 조사관들은 언뜻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적구성이 돼 있다. 조사관 49명 중 민간 출신 조사관 2명은 그동안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해 노동, 인 권 등 사회운동 각 분야에서 활동해온 사람들이고, 파견 공무원 조사관 27명은 경찰, 군, 국정원, 검찰 등에서 10년 이상의 수사경 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82)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해석 또는 범주의 문제가 포함된 지침서 성격의‘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이해’라는 글을 당시 김 형태 1상임위원이 작성하였는데, 당시 허명환 행정과장이 이를 반박하는 글을 위원회 홈페이지에 게시하였으며 파견 공무원들이 집단적으로 이를 지지하는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