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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국가를 잃고 온 민족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을 때, 오직 하나 뿐인 자기 목숨을 바쳐 국가를 위해 싸우는 일은 위대한 일이다.한 사람의 독립운동가가 나오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한 집안에서 여러 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온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것은 그 모두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런 선열들의 공덕 때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천, 하동, 합천군에 세거하던 청주한씨 병사공파 가문은 선비의 가문으로, 평화시에는 많은 학자 관료들을 배출하였고, 나라가 어려울 때는 여러 명의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여 나라를 구제해 냈으니, 선비정신을 올바르게 실천해 온 모범적인 가문이라 할 수 있다. 공은 이 집안이 배출한 인물 가운데 한 분이다. 공은 1852년에 태어났다. 족보상의 휘는 홍학이고 초휘는 치문이다. 한씨는 본관을 청주로 하는데, 고려 삼중대광 위양공 휘 란을 족보상의 시조로 삼는다. 대대로 저명한 인물과 큰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름난 가문이 되었다. 고려말 판후덕부사문경공 류항 휘수은 문학과 명절로 이름이 났다. 그 아들 영의정 서원부원군 개국공신 문절공 휘 상경은 조선초기 명경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 손자 영의정 문정공 휘 계희는 공신으로 서원군에 봉해졌다. 그 손자 돈암 휘 승리는 부사직을 지내다가 연산군의 난정을 만나 영달을 다 버리고 진천로 내려와 숨어 살았다. 경상도 일원의 한씨들은 대부분이 돈암공의 후손들이다. 돈암공 증손 조은 휘 몽삼은 학덕이 있어 왕자사부로 추천되었다. 그 증손 휘 범석은 무과에 급제하여 부총관과 5도의 병마사를 지냈는데, 장수로서나 행정장관으로서의 능력이 출중한 인물로 이름이 높았다. 그 증손자 휘 계인은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는데, 곧 공의 부친이다. 모친은 숙부인 전주이씨로 인득의 따님이다. 임진왜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