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page


170page

독립운동가 장현근, 신정숙 선생 부부가 살았던 본가집이다. 장현근(1909.9.19~1969.5.19) 선생은 음성읍 신천리 출생, 개성상업학교에 재학중에 독립항일투사 신정숙과 결혼, 1926년 9월 흥사단원으로 일본인 위주의 교육과 학교운영에 저항하다 퇴학을 당함. 1927년 형인 장현팔이 거주하는 전북 정읍에서 토리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항일정신과 민족의식 고취등 후진양성에 전념함. 1931년 11월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상해교민단의 서기, 의경대 간사, 한인청년당 이사 겸 서무부장등을 맡아 항일투쟁을 전개함. 1932년 윤봉길의사의 의거 뒤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월 8일에 국내로 호송되어 옥고를 치르고, 1932년 7월에 석방되자, 1937년에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상해, 만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위하여 노력함. 신정숙(1910.5.12~1997.?)선생은 평북 의주에서 출생, 선천보성여학교 2학년 때 반일사상 가정 학생이라하여 퇴학당함. 그 후 19세에 장현근 선생과 결혼함. 결혼 후 항일운동을 위하여 상하이로 떠난 남편이 1932년 윤봉길의사의 의거 뒤에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겪을 때 옥바라지를 했다. 남편인 장선생이 석방되어 중국으로 망명하자, 신선생도 독립운동을 하고자 중국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김구 주석의 보좌약으로 근무함. 그 후 신선생은 중국군 특별간부단에 지원 입대 훈련을 받은 후, 광복군에 입대. 1941년 3월 1일 광복군 제3분처 위원 겸 회계조장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며, 1942년 10월 광복군 제2지대 3구대 3분대에 편성되어 중국 유격대와 합동공작으로 일본군의 교란, 선전공작의 전개, 적에 관한 정보 수집 활동등을 전개함 정부에서는 장현근선생에게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며, 신정숙선생에게는 1977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