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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석교 비문해석
수래와 교량은 온 백성이 내왕하기에 편리한 것이었든 만큼 과거에도 또한 왕정(王政)에 있어서 한낱 큰 일이었다. 따라서 진(秦)나라의 하교(河橋)나 진(晋)나라의 부교(浮橋)가 또한 그런 것이었다. 지금 읍의 남쪽에 있는 계곡은 촌락을 안고 흘러서 읍터으 수문이 되고 있으며 큰 길이 그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길은) 사신(使臣)들이 貢物을 바치러 지나가는 터라, 이런 까닭으로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든 것이 아주 오래전 부터였다. 그러나 물이 넘치면 나무 다리가 무너져 늘 건너기 어려운 병폐가 있었다. 하루는 읍민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다리로 물을 오래 막을 계책으로는 (나무대신)돌로서 다리를 만드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읍민 김윤관(金允寬)이 승후(承候:웃어른들에 문안을 드림)들의 명을 받들어 백성으로부터 재물을 모으고 먼산의 돌을 깎아 이 다리를 쌓았는데 몇 개월 뒤에야 비로소 일이 끝났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물을 건너지 못하는 걱정꺼리가 없어졌으며 읍에는 압류의 이가 있게 되었으니 이는 돌이 천년을 지나도록 변치 않기 때문이다.
낭게 볼에 새길 글을 부탁하니 나는 문사가 부족하므로 ... 사양치 못하고 드디어 명을 지었으니 가로되 다리를 돌로 다음은 오래도록 지탱하기 위한 계책이요, 다리 모양은 돌로 깎아 무지개형으로 만들었네 오래 오래 견디려니 그 공을 알겠네
인용 : 영산 향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