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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법린의 민족의식 형성과 실천 71 까지 3일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반제국주의연맹 총회(GENERAL COUNCIL OF THE LEAGUE AGAINST IMPERIALISM)’에 최린과 함께 참석하여 한국의 실정을 보고하였다. 55) 이 대회에서 재정, 조직, 선전 문제가 결의되었다. 김법린은 프랑스에서 공부를 계속하고자 했으나, 1927년 3월 불교계 의 간곡한 요청으로 귀국을 결심했고, 56) 1928년 1월 14일에 귀국했다. 57) 좀더 공부하야 박사학위나 어더 가지고 오려하엿스나 고국 난지도 오래엇고 고국을 그리는 마음이 간절하매, 본국에서 일하는 분의 일을 와서 돕는 것이 그곳에서 학창생활을 더 계속하느니보다 낫겟다는 생각 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칠팔년만에 본국에 돌아오니 모든 것이 만히 변 하엿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 안을 중심으로 일하지 안흐면 안됩니 다. 장래는 교육계에 힘쓰며 더욱 학술방면에 연구코자 합니다. 58) 3. 한국에서 일본제국주의 정책보고 연설 1) 한국의 문제 검토 대회에서 각국 대표에게 배포한 것으로 알려진 한국의 문제(DAS KOREANISCHE PROBLEM) 는 참가자 중의 한사람이었던 이의경 (이미륵) 소장본이 독립기념관에 기증되면서 알려졌다. 59) 당시 한국 대 55) 동아일보 , 1928.1.16일자, 「被壓迫大會委員 金法麟氏 歸國」.; 중외일보 , 1928.1.17 일자, 「全世界被壓迫民族大會에 參席했던 金法麟氏 歸國」.; 당시 동아일보에서 “간부 회” 내지 “위원회”라고 표현한데 비해, 중외일보에서 “제2회 전세계피압박민족대회” 로 잘못 알려졌다. ‘2회 대회’는 ‘제2차 반제국주의 세계대회(Second Anti-I mperialis t World Congress)’가 옳으며 192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최되었다. 56) 동아일보 , 1927.3.23일자, 「朝鮮側委員 金法麟氏 略歷」.; 김광식(2000) pp.302-303. 57) 동아일보 , 1928.1.16일자, 「被壓迫大會委員 金法麟氏 歸國」. 58) 조선일보 , 1928.1.16일자, 「巴里文學士-金法麟氏의 歸京」. 59) 이정은(1999) p.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