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page

174 • 가평의 일과 민맥 하고, 바닷가의 어리석은 풍속을 바로잡아 일으키 니, 고을이 크게 변하였다 을묘년에 課長(간장)으로 들어와 承답(승지), 兵햄(병조), 메훨(형조)參議(침-의)에 임명되 고, 기미년에 내환이 있었다 순조 신유년에 연하여 承冒(승지) , 課長(간장), 兵뻗(병조)參 議(참의), 承冒(승지)애 제수되었다. 왕께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地關(지별)만이 좋은 자리에 나가서 한 사람이 겸직을 하고 있는 예가 많으니, 장차 빡籍(서적)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밝은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맹자의 말씀으로 쩌:닮(간신)은 그 가르치는 바를 좋아하지 않아서, 말단에 가히 흐려지 는 폐가 자주 있고, 아첨하는 간신이 진출하고 있습니다 하니 왕이 嘉納(가납)하였다. 갑자년에 課長(간장)이 되었는데, 權給(권유)라는 죄인을 구속만 해놓고, 죄상을 밝히지 못하고 있어서, 죄상을 밝히도록 소원을 했는데, 臺課(대간)의 한 사람이 속결하라고 陳請 (소청)를 하였으나 공이 이를 거 절하였다. 다시 承冒(승지) 겸 大司成(대사성)을 제수 받았 는데, 내 · 외직을 겸하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죄인 朴夏源(박하원)이 풀려나니, 명예회복 이 어렵다고 하였는데, 이 것을 들은 자가 臺誠(대간)을 俠l값(사주)하여, "Í2짧(김겸) , 鄭取善 (정취선) 등이 거짓으로 글을 교환하여, 이 것이 공에게까지 미치려고 하니, 왕이 살펴서 이 를 배척하였다. 그 후에 쩌뻗參講(형조참의)에 제수되고 被錄(액예: 예조침-판)의 직을 가진 자가 후원의 야간통행금지를 무시하고 연습을 지-행하여 감시하는 군사가 말에서 떨어 질 뻔 하기도하 여 이와 같이 무엄한 행동을 금지 하도록 상주하였다. 또한 아뢰기를 짧徵(위징: 딩의 개국공신, 대간)이 1'1검|찢(소능; 딩- 태종의 능)을 상대할 때, 課言(간언)이 적지 않으며, 또한 잘못을 말하는 것 이 아니라, 그가 하는 말이 정직하고 합당하 며 명백하였으니 옛적에 때點(급암· 한 나라 충신)이 간하는 체통을 잃지 않았던 것과 같습나 다 하였다. 이날은 왕의 얼굴(훔앓펀、· 용안)에 감동의 빛을 나타내었다. 왕이 강연에서 친히 제신에게 賴字(운지-)를 내여 글을 짓게 하니 공이 앞에 나가 웹、字(운자)을 띠서 20 餘演(여 운)의 古詩(고시)를 지었다. 정묘년에 다시 洪樂(홍락) ÁII밤鎭( 백치진)을 임명하니, 스스로 장이 되어, 관문을 굳게 방어하고, 준례대로 쩨歡之禮(향음지례)를 시행하며, 關市(관시)에서 금지하던 것을 후일을 위하여 개혁하고, 절차에 따라서 길에 나가니, 백성들이 술병을 가지고 나와서, 행열이 다 지나갈 때까지 환영하였다. 신사년에 돈녕승지 형조침-판, 총관, 경연, 임오년에 형조참판을 특별히 제수하였다. 그 때에 1i,1械(흉적) I=!J鼎(신정)이 허위로 戀討(징토)를 假裝(가장)하여, 太學(태학)에 글을 올렀는데, 왕이 그 진상을 조사해서 밝히라고 했는데, 확실히 못 밝히고 말았다 공이 換際r로(만료당)에서 다시 상소하니 왕이 침전에서 술잔을 권하면서, 다시 조 사해서 사형을 내리라고 하니, 공이 불가함을 아뢰고, 다투는 자가 없었다. 연이어 승지로 제수하고 總管(총관) 奉常(봉상) 提調(제조) 左尹(좌윤) 義禁(의금) , 그해 겨울에 황해 감사에 임명되니, 이에 백성을 사랑하고, 법률을 어 질 게 하여 狗禁(구금)을 줄 이고, 곡식과 무역을 소생시키며, 갖E폐(사형)의 죄수를 다시 심사하여, 살리는 자가 많았다 관리의 f-F:劉(척출)을 삼가고, 새 것 이 옛 것을 이기는 것이 쉽지 않음을 믿으니, 어찌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