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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도탄속에서 건지고 민족의 정기를 존망의 위기에서 붙드는 것은 그 나라 그 백성된 이의 저마다 잊을 수 없는 소망이라 할지라도 몸을 온전히 구국의 대의앞에 앞장서서 바침으로써 겨레의 잠자는 혼을 일깨워 이끌기란 비상한 사람이 아니고는 능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근조선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던 비상한 때에 몸을 초야에서 일으켜 민중운동의 선구자로 민족운동의 지도자로 역사상에 큰 자취를 남긴 비상한 인물이 있으니 이는 의암 손병희선생 이시다. 선생은 4194년 4월 초팔일 청원국 북이면 대주리에서 나셨다. 천품이 영매 호방하여 어려서 부터 중망을 지녔으나 부패한 사회에 쓰일 곳 없는 몸이라 강개한 세월을 한낮 낭인생활로 울회를 풀 따름이더니 4215년 10월 5일에 선생은 분연히 뜻을 세우고 동학에 입도 하셨다. 이는 근세 조선의 대사상가요 동학의 창도자인 최수운선생의 보국안민 포덕천하의 교지에 깊이 공명하셨기 때문이다. 때에 선생의 나이 스물두살 이었다. 선생은 동학도에 드신 그날부터 방종하던 생활을 청산하고 문닫고 들어앉아 매일 동학의 주문을 삼만독하고 짚신 두켤레 삼는것을 일과로 하여 정진하며 한달에 여섯번 청주시장에 걸어가 짚신을 팔아 생계를 이으시기를 삼년을 마치고 나서 때마침 친히 선생을 찾아오신 동학 제2세 교조 최해월신사 에게서 동학의 도통을 받으셨다. 선생은 4227년 갑오 동학의거에 최해월의 친명을 받아 보은 장내에서 진을 갖추고 남하하여 전봉준과 합세하셨으니 북접통령으로 동학군을 지휘하여 탐관오리를 베어 제포구민의 기치를 세우고 척양척왜를 포방하여 민족 자주의 대의를 밝히셨다. 선생은 4230년 서른일곱살 되던 해에 동학의 제3세 대도주가 되시고 이듬해 최해월 신사가 순교하자 그 교통을 이으셨으나 휘몰아치는 동아의 풍운앞에 날로 기울어 가는 조국의 운명을 좌시할 수 없어 큰 뜻을 품으시고 이름을 이상헌이라 변칭하여 망명의 길에 오르니 때는 4234년 이었다. 중국 상해에 들려 국제정세를 살피시고 몸을 돌이켜 일본 동경에 머무를 때 노일전쟁이 터지매 선생은 국내의 교중두목과 일본에 망명중인 여러 인사와 손을잡고 진보회를 조직하여 일대 민중운동을 일으켜 독립정신을 고취 하셨다. 때에 일부 반동분자가 발기한 일진회가 일본의 앞잡이로 을사조약을 찬성하는 흉서를 발표하자 선생은 크게 분개하여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등 제공과 같이 급히 귀국하여 동학당으로 매국노가 된 일진회의 주동분자 이용구 송병준등 70여명을 출교시키고 동학을 고쳐 천도교라 개칭하고여 정통 제3세 교주라 일컬으니 선생의 수하에 모이는 자 백만을 헤아리니 교도의 중망을 한몸에 받으셨다. 4241년에는 대도주의 자리를 박인호에게 전수 하시고 경향 각지에 학교를 경영하여 육영사업으로 항일 투쟁의 힘을 길러 조직과 훈련을 굳게 함으로써 시가가 무르익기를 기다리시더니 때마침 일차대전이후 민족자결주의 조류가 일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