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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학 전문학생 양봉근은 구포 면서기 임봉래와 윤경 등과 1919년 3월 27·28일 박영초·이수련 집에 모여 3월 29일 구포장날을 거사날로 정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고, 큰 태극기 하나와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현수막도 만들었다. 3월 29일 정오 박덕홍·손진태·김장학·이몽석·양대용·김영길·정치호·정용학·안화중·허희중 등 청년동지들과 비밀리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고 장꾼 1,000여 명과 더불어「대한독립만세」를 연이어 크게 외쳤다. 시장은 삽시간에 흥분과 감격의 도가니로 화하였다.
일부는 시위를 위하여 시장 철시를 호소하면서 장꾼을 지휘하였고 김윤길 등은 구포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에게, 민족적 양심으로 뉘우치고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후 김옥겸 외 11명의 주도인물이 구포 주재소에 구금되자 임봉래·윤정은 등은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로 돌진하여 구금된 동지들을 구출하려고 하였다. 일제 경찰들은 시위군중들에게 무차별 총탄을 퍼붓었다. 이 과정에서 일군경 3명과 한국인 경찰 1명이 중상을 입었고, 시위 군중들 중에는 9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재판에 회부된 인물은 42명으로 대부분이 20-30대의 청년들이었다.
부산광역시 북구청지명위원회에서는 광복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95년 9월 28일 구포역앞 - 구포시장통 - 대리천 복개도로까지 도로를 구포 만세거리로 지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