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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수의 綠 이후 공양왕대 최대의 정치적 사건은 왕 2년(1390) 5월에 발생한 尹훨 · 李初사건이다 37) 이 사건은 무고로 판명되었지만, 여기에 연루된 인물들은 이색, 우현 보, 이림 등 공양왕 옹립에 반대하다가 유배된 인물이 대부분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이 성계파는 다시 대간을 동원하여 이색 등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고 나섰다 무고로 판명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계파가 이를 정치쟁점으로 삼은 것은 여러 가지 정치적 효 과를 노린 것이었다 즉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색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노선 의 신진사대부를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공양왕 옹립애 참여했던 신진사대부를 결 속하는 한편, 자신들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던 공양왕의 활동을 제한된 범위 내 에 묶어두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박익은 공양왕 2년 尹끓 · 李初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어떠한 대응 자세를 보였을까? 그는 위화도회군 후 어느 시기에 잠시 낙향해 있다가 다시 상경하여 정몽주 살해사건 이 발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시기에는 개경에 있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의 문집 ‘實隨’에서는 f멤朝, 즉 우 · 창왕대 정치가 어지러워 동생인 天때과 햄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정몽주 · 이색 등과 道義로써 교류하다가 공양왕대 다시 서울로 올라가 예조 판서를 역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38) 그런대 우왕대에 벼슬을 그만두었다는 것은 사 실과 다르다 앞에서 보았듯이 우왕 13년 8월까지 동경판관을 지냈고, 이후에 사재소감 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익이 낙향한 시기는 언제쯤일까? 3시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위화도회 군 이후, 창왕의 폐위와 공양왕옹립기, 윤이 · 이초사건 발생 후가 그것이다 위화도회 군 이후에 낙향했다면, 박익은 회군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우왕의 폐위에 도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교류했던 이색 · 정몽주 가 이를 수용하는 입장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박익 역시 이를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박익의 낙향은 공양왕 즉위 후 어느 시기였던 것 으로 보인다. 공양왕을 옹립한 후, 이성계세력은 옹립에 반대했던 인물들을 차레차레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폐위시킨 우 · 창왕을 應A으로 강등시켰다가, 政堂文學 徐뚫術 37) 尹활 · 李初사건의 발생배경과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超햄續, r朝빡建國과 尹활 · 李初사건」, F李困 需1빵士九句紀念歸國史學論蕭~, 지식산업사, 1987 및 李亨雨, 위의 글 참조. 38) r速夫麗運將굶 {행朝政쩍L 先生見幾先作 與弟密‘城君天빠 1따官還빼 삼門 自靖 與댄m떻故隱諸l옳 篇道 義交 假日 唱홉Jfl 懶1M:時事 옆讓朝 復起寫禮判J(U'松隱先生文集』 권 3, 實題) - 1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