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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순은 전라남도 해남(海南)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독립만세가 일어났을 때 우수영(右水營)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을 못하고 있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던차에 1920년 4월 22일 문내면 우수영(門內面右水營) 보통학교 학생인 윤인섭(尹仁燮)·전유봉(全酉峰)·이준섭(李俊燮)·박동수(朴東秀)·최이규(崔伊奎)·주봉옥(朱奉玉)·박규성(朴圭星)·박용문(朴用文)등 청년들이 독립만세시위를 결행하기로 발의(發議)하여 윤인섭·전유봉·이준섭이 동외리(東外里) 성벽 밖에서 태극기 3개를 만들어 각기 1개씩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로 행진하며 독립만세시위를 하다가 일본경찰에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양성룡(梁成龍)·주영철(朱永澈) 등과 함께 연행된 청년들의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거절당하자, 독립만세시위를 거사할 것을 결심하고 태극기를 만들게 하는 한편,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일시 귀향 은거하고 있던 최원석(崔元錫)에게,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강조하는 격문을 작성하도록 부탁하여, 청년들로 하여금 등사케 하였다. 4월 23일 오후 7시경 5백여명의 시위군중이 선두리(先頭里)의 선창가로 몰려들었고, 미리 만들어진 태극기와 격문이 다 돌려졌을 무렵 그는 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동문(東門)을 향하여 행진하였다. 그러자 동외리 경찰주재소의 일본 경찰은 형세가 매우 불리한 것을 알고 해남경찰서에 응원을 요청하였다. 군중이 평화적으로 시위하며 읍내를 몇차례 행진하고, 경찰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을 때 해남경찰서로부터 불러들인 일본의 무장병이 총을 쏘고 총검을 휘둘러대니, 그는 시위군중의 안전을 위하여 양성룡·주영철·김종호와 함께 스스로 주동자임을 자처하여 다른 시위군중을 무사히 귀가시킨 후 체포되었다. 결국 1920년 5월 13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