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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캐를 정별하는 데 공을 세웠다 했고, 실제 동경판관으로 재직시 왜구토벌에도 참여 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요동정벌에도 참여했을 수 있겠다 우왕 14년 4월부터 시작된 요동정벌은 八道都統使 崔瑩을 중심으로 하여, 훨敏↑I~를 左軍都統使, 李成桂를 右軍都統使로 삼아 군사 38,830명, f짜^ 11,634병, 馬 21,682필을 거느린 대장정이었다 30) 그러나 다음달 5월에 압록강을 건너 威化島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이성계 주도 하에 며軍을 감행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실패로 끝난다. 이후 정계는 이 성계를 중심으로 한 회군세력의 주도로 운영되면서 조선건국에 이르기까지 이에 걸림 돌이 되는 반대세력을 숙청하는 과정이 연속된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신흥 무장세력이 주도했지딴, 여기에는 신진 사대부의 정치적 이해관계도 개입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우선 신진사대부 의 외교노선이기도 한 친명노선이 회군의 명분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정도 전은 일찍이 이성계와 교우관계를 가지면서 역성혁명을 암시하고 있었다)1) 또한 요동 정벌에 참여했다가 회군을 건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南閒 · 趙仁決은32) 조준 · 윤 소종 · 듬담해 • 鄭地 등과 교우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히 조준은 이성계와 모든 사안을 함께 의논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33) 그러므로 위화도 회군은 정치 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하고 있던 이성계 등 신흥 무장세력과 현실개혁에 관심을 갖고 있던 신진사대부의 정치적 결합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박익과 교우관계를 가지고 있 던 이색이나 정몽주도 회군 사실을 수용하는 입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위화도 회군 후 집권한 이성계세력은 조선건국에 이르기까지 몇차례에 걸쳐 반대세 력을 숙청면서 왕조교체의 기반을 조성하고 있었다 우왕의 폐위, 창왕의 폐위와 공양 왕옹립, 윤이 · 이초사건, 정몽주 살해사건 등은 조선건국과정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정 치적 사건이고, 이 과정에서 이성계세력은 왕조교체에 걸림돌이 되는 반대세력을 대대 적으로 숙청하여 갔다. 위화도 회군 이후 조선건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숙청된 인물들 을 보면 다음 표와 같다. 30) ú'고려사』 권 137, 열전 50, 우왕 14년 4월 정 미 31) 韓永愚, F鄭道f펄思想의 Wf究~, 서울대출판부, 1983, 25 -26쪽 32) ú'高麗史』 권 116, 列댐 29, 南閒. 33) ú'高麗史』 권 118, 列펙 31, 趙浚. - 16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