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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건국 이후 낙향 · 은거한 인물로 구성되어 있다 29) 박익의 은거를 전하고 있는 『典故大方』의 ‘高麗社門洞七十二A’은 바로 『華i每師全』 「言志錄」의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言志錄」의 내용을 보면, 정몽주와 同甲이 었던 任先味, 曺義生, 굶好l生, 李瓚 등은 1392년 4월 4일에 정몽주가 순절하자 간소하 게 장례하였는데, 이 때 정몽주와 뜻을 같이 했던 인물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경의 제의에 따라 참석한 사람들이 앞으로의 처신을 밝혔는데, 이숭인, 이색, 박의중, 김충한, 박익, 원천석 등은 낙향 · 은거의 뜻을 밝혔다. 이에 따라 이들은 不朝視에서 작별하고 임선미, 조의생, 맹호성, 이경 등은 l392년 10월 16일 함께 캄門洞으로 들어 갔다는 것이다. 이처럼 박익은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조선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고향:으로 낙향 · 은 거하여 節義를 다하였다. 그러면 박익은 왜 낙향의 길을 걸었을까? 이는 물론 박익이 지녔던 학문과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당시 정계 상황과 교우관계가 영향을 미쳤 다는 점에서 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익은 우왕 13년 8월 동경판관으로서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司宰少藍의 직 을 맡고 중앙 관료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공민왕 말에 외교관계를 체결했던 明과의 관계에 긴장이 감도는 시기였다. 明은 외교관계를 체결한 이래 원간섭기보다 더하게 지나친 내정간섭과 과다한 공물을 요구함으로써 고려 국내에 반명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우왕 즉위년 11월 明使 蔡植의 암살사건이 발생하기 도 하였다. 이후 對明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어 외교 단절 상태가 계속되다가 고려의 여 러 가지 노력 끝에 우왕 11년에 가서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재개한다. 그러나 明은 이후에도 고려에 대하여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마필을 요구하는 한편, 요동 출입을 폐쇄하는 무단적인 조치를 취하고, 마침내 우왕 l3년 말에는 鐵領衛 설치를 드러냄으 로써,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고려는 요동정별로서 이에 대응하였다 박익이 요동정별을 준비하는 데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 가 소속되어 있던 司宰츄가 魚、梁과 川澤을 관장하는 재정기구였다는 점에서, 요동정벌 에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는 역할을 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요동정벌애 직접 참여했 을 가능성도 있다. 그의 行狀과 實題에 따르면 그는 이성계를 따라 왜구와 변방의 오 29) 김정자, 위의 글, 117쪽 - 1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