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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살리라 |323| 10월 20일 김대중 대통령은 유가협, 추모연대 대표를 청와대로 초청하여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의문사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특별법이 정기국회에서 제정될 수 있도록 청와대 와 당(국민회의)이 협력하도록 지시하였다. 48) 그리고 10월 30일, 5개월 동안 서울을 비롯 한 부산, 광주, 대구, 제주 등지에서 진행한 2단계 투쟁을 마무리 한다. 1-3-3. 3단계 투쟁 (1998.11.4~1999.12.30) 1998년 11월 4일 드디어 여의도에 천막을 쳤다. 천막농성을 감행하게된 것은 당초부터 계획이 그렇게 짜여졌고 계획대로 실행되어온 점도 있었지만 대통령이 확약 49) 을 한 것도 한 요인이 되었다. 의문사 유가족 등은 천막 농성을 시작하면서 아래와 같은 성명을 발표 한다. 민족민주유공자명예회복과의문의죽음진상규명특별법제정을촉구하는 국회앞철야농성에돌입하며 자식을잃고, 남편을잃고살아온세월이얼마였던가. 가족들이억울하게죽어간뒤, 우리는독재정권과주변의눈총을받아가면서도오로지목 숨을 바쳐야만 했던 그 염원이 옳았다는 신념으로, 지금껏 어느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고 살 아왔다. 목숨을잃은가족들에게독재정권이씌워놓은범법자의굴레를벗기기위해, 안기부, 기무사, 보안수사대가 살해하고 나서 자살로 은폐시킨 의문의 죽음 진상 규명을 위 해, 우리는혼신의힘을다해싸워왔다. 그러면서우리는죽어간가족들의뜻을깨닫고자랑차게민족민주운동을해나가는투사가 되었다. |322|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나타나서 자기가 면담하겠다는 것을 일언지하에 거부하자 7월 14일 경찰청장이 면담을 하 겠다고 하여 항의집회를 중단하고 면담 결과에 따라 재개 여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경찰청장, 보안국장, 그리고 의문사 유가족 등의 요구에 따라 6월 26일 연행 현장 책임 자였던 서대문 경찰서장을 배석시켜 경찰청장의 사과와 서대문 서장으로부터 피해 보상을 받고 경찰청 항의 집회를 마감하였다. 이 일을 통해 의문사 유가족 등은 다시 자신감을 가 지고 투쟁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서 노사정위원회 항의방문 45) 을 하고 국회의원 초청설명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 참 석한 이미경, 이수인, 이길재 의원은 특별법 제정을 여야 공동으로 의원입법하자는 것과 이를 원만하게 하기 위하여 국회의원들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바로 여야의원들 규합에 나서 국민회의 장영달, 이길재, 천정배, 유선호, 한나라당 이부영, 이미 경, 이수인, 이신범 의원이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등 피해자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 별법 제정을 추진하기로 하였고 46) , 8월 3일 결성된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 규명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에 여야의원 65명이 국회특별위원으로 참여하기로 하고 정 기 국회에서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국회 특별위원은 국민회의 장영달, 이길 재, 천정배, 유선호, 김근태, 김영진, 김충조 의원 등 39명, 자민련 이긍규의원, 한나라당 이부영, 이미경, 이수인, 이신범, 김수한, 강삼재, 안상수의원 등 25명이었다. 47) 9월 1일 기독교회관에서 개최된 1998년도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 규명을 위한 2차 학술회의에서 민변에서 성안한 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안과 민족민 주유공자의명예회복및예우에관한법률안이 발표되었고, 9월 14일 조계사에서 민족민주열 사 명예회복과의문의죽음진상규명특별법 제정 국민대토론회를 거친 후 국민회의에 전달 하였다. 다음 날 이와는 별도로 특별법 제정을 위한 기자회견을 국회에서 갖고 청원 소개 의원 이길재 외 58인, 청원인 이창복 외 5만2천8백98인이 국회에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 의문의죽음진상규명특별법 국회 청원을 하기에 이른다. 45) 1998년 7월 24일 46) 국민일보, 1998.7.30 47) 서울신문, 1998.9.16 48) 한겨레, 1998.10.21 49) 대통령 면담을 통해 법제정 확약을 받는 것도 처음부터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초에는 6월경 면담을 하려 하였으나 차일피일 늦어져 10월에야 성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