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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정3품), 藍(종3품)이 각각 1명씩 있었고, 아래로는 升(종6품)과 注辯(종7품) 각각 2명 이 배정되고 있었다. 更屬으로 書史 6명, 記官 2명, 算士 2명과 雜織將校 2명 이 배치되 어 소관 업무를 돕고 있었다. 박익이 맡았던 少藍은 이 기구의 중간 보직으로서 상하 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보아진다 박익이 언제 司宰少藍에서 피뭔홈B~뚫郞으로 승진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공양왕대에 곧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 밀양으로 낙향하였다 당시 정치상황이 여의치 않아서였을 것이다 특히 이성계 중심의 조선건국세력이 왕조 개창을 위해 반대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과정이 그를 관직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낙향해 있던 박익은 정몽주의 권유로 공양왕 말년에 다시 상경하여 잠시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성계 세력이 정몽주를 살해하고 조선왕조를 개창함으로써 節義를 지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3. 조선건국과 낙향, 은거 19세기 초에 간행된 『典故大方』 권 4에는 ‘高麗社門洞七十二A’ 땅목이 설정되어 고 려말 조선건국과 함께 절의를 지켜 낙향 · 은거했던 72명의 명단을 소개하고 있다. 이 른바 ‘두문동 72현’이 그것이다. 禹玄寶로부터 시작되는 이 명단에는 朴太始, 즉 朴翊 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 쨌註에서 「松‘꽃歸於故!ÌJ 이라 하여27) 박익이 고향 밀양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삼門洞 72賢의 사실을 전하고 있는 대표적인 기록으로는 李行의 문집인 『騎牛集』 소 재 「社門洞七十二賢錄」과 고려말 인물인 申賢 및 그 자손들의 글을 모아놓은 『華海師 全』 소재 「言志錄」이 있다쟁) 두 기록의 내용은 조금씩 달라서, 두 기록에 공통되는 인물은 30명 뿐이고 42명은 다르게 선정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봉주를 중심으로 기 록한 『짧牛集』이 조선건국 이전에 이미 죽었거나 축출된 인물, 이미 은거하고 있는 인 물 등 다양한 구성을 보이고 있는 반면, 우현보를 중심으로 기록한 『華海師全』은 주로 27) ~典故大方』 권 4, 高麗삼門洞七十二A 28) 이 두 기록에 대한 고증은 김정자, 「삼門洞t十二賢의 選定A物에 대한 검토 ~華海師全」 과 ~,t짧 牛集』을 중심으로-j, 「짧.大史學Æ 22, 1998 참조. - 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