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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식(朴鍾殖)은 전남 진도(珍島) 사람이다. 전남 목포(木浦)공립상업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 광주(光州)에서 대대적인 학생시위항쟁이 벌어져 수십 명이 피검되었다는 소식에 접한 그는 최창호(崔昌鎬) 등 동교 학생들과 수 차 회합하고, 목포에서도 동월 19일을 기해 동조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이재실(李在實)이 「피감금학생 즉시 탈환」, 「총독부 폭압정치 절대 반대」, 「피압박민족해방 만세」 등의 구호를 쓴 붉은 목면(木棉) 대기(大旗) 3개와 붉은 색종이로 된 소기(小旗) 약 120개를 만들어 배부하고, 정찬규(鄭燦圭) 등이 등사판으로 격문 약 1,500매를 인쇄하여 서로 나누어 가짐으로써 시위 준비를 마쳤다. 드디어 19일 아침 그들은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 앞에 집결하여 일제히 소기를 흔들고 격문을 살포하면서, "싸우자 2천만 동포여! 광주학생을 탈환하라.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싸운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 시위운동으로 그는 다른 주동학생 21명과 함께 붙잡혀, 1930년 3월 2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동년 6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10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