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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대장 김치홍 장군(서기1880년 ~ 서기1910년) 1990.8.15. 대한민국 영예의 독립장 추서 선생의 본명은 東弼(동필)이요, 본관은 金海(김해)이며 資憲大夫雲夏(자헌대부운하) 5대손인 泳八(영팔)의 자로 서기1880년 영암 시종면 신흥리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본시 효우가 출천하고 의표가 단정하며, 기절이 대단하였다. 서기 1896년 영암의거에 참여하고 정미(1907년)말 영암 의병대가 조직될 때에 단호히 가담하여 朴士化(박사화) 휘하의 기준장이 되었다. 심남일이 영암에 주둔하매 그에 합류하여 무신 3월 7일 강진 오치동 작전에서 적10여명을 사살하고 적지않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이어 4월 15일 장흥 곽암싸움에서 왜장 3명을 사살, 6월 19일 남평 장담원에서 적 5명을 사살, 7월 30일 영암사촌에서 왜헌병대장 금평산을 부하 10여명과 같이 사살, 8월 1일 나주 반치싸움에서 적 20여명을 사살, 10월 9일 해남성내에서 헌병 백여명을 사살, 10월 27일 능주 돌정리에서 적 20여명을 사살, 서기 1909년 1월 30일 남평 죽곡면 운암리에서 적3명을 사살 등의 승전고를 올렸으나 이후 2월 26일(음력 2월 7일) 남평 선동싸움에서 대패하고 2월 27일(음력 2월 8일) 농소싸움에서 나주의병대장 朴敏洙(박민수) 외 40여명의 사상자를 냈었다. 한편 6월 7일 나주 반치에서도 패하여 7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위와 같이 호남 대토벌작전이 전개될때까지 끈질기게 용전분투하였지만 순종의 칙령으로 의병군은 부득이 해산되었고, 朴平南(박평남)과 함께 영암에서 잡히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광주에서 대구로 이감되어 마침내 교수형에 처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