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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 윤선생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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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응선(尹膺善)[1854~1924]은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높아 1889년(고종 26)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주역』를 공부하던 40세에 의당(毅堂)박세화(朴世和)를 만났다. 윤응선은 본래 양평 출신인데, 병인양요 이후 조부를 따라 청풍 장선으로 이주하였으며, 박세화를 쫓아 배웠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한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이 충주성을 장악하고 기세를 올릴 때 동문들과 함께 나아가서 성원하였다.
1905년(고종 42) 초에는 청풍에서 척사적 성격이 가미된 향약을 조직하고 스스로 도헌(都憲)을 맡아 활동하면서 일진회를 견제하였다. 이 조직을 기반으로 그해 여름에 박세화와 함께 문경의 산속으로 들어가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병으로 잠시 귀가하였다가 제천시 덕산면 광천(廣川)에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일곡서당(日谷書堂)을 짓고 강학에 힘쓰다가, 1910년 국권 피탈에 통분한 박세화가 단식 끝에 순국한 뒤 진천, 음성 등지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신현국과 함께 병산영당(屛山影堂)의 모체인 용하영당(用夏影堂)에 박세화를 배향하였다.
출처 : 한국향토문화 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