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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 가평의 일과 인맥 곧 수레를 타고 숙용(宿春)의 땅에 이르러 정성으로 기원하여 상의 허락을 받으니 경 내에 서 김-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얼마 후 집에 돌아와서 문을 닫고 나가지 않고 친구들과 술을 즐기었다 종종 을해년에 질병이 악화되었으나 의식은 맑아서 제사절차와 가사의 절을 써놓고 드디 어 |一월 九일에 생을 마치 니 겨우 오십(五十)세였다. 십이월에 서교 성산리 계좌에 징-사 지냈다. 공은 외모 와 성품(종性)이 순후(淳原)하고 기량과 법도(器度)가 평탄하였다 그 때에 모친 김 숙인이 정성스런 요양(忍養)을 다했는데 일찍 이 부군을 잃은 아픔(未亡之痛) 속에서도 의연히 말 하기를, 단 하나인 나의 아들과 며느리가 있으니 아들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 하리요 하였 는데 일을 당하니 너무나 애절하고 장사의 예절을 지나치도록 다하니 다들 감탄하였고 조 상을 받드는 일 친족을 돌보는 일을 정성스럽 게 하였다. 중씨가 있었는데 현명하나, 공사 에는 나가지 않고 형수를 존경하고 조카 딸을 잘 키워서 그 딸이 성장하여 사람을 사귀는 데 자유로웠고 예쁘다고 칭찬하는 사람을 치시-하게 생각하고 재난을 당하는 사람을 극력 도와주고 적은 권력을 믿고 공과 친척인체 하는 사람을 받아 주지 않고 저쪽에서 위세를 부려도 의연히 물리치니 다들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영배공은 나와 젊은 시 절부터 절친 하게 지냈는데 위인이 관대하고 도량도 넓었었다. 내가 서 (西) 절도사(節度使)로 있었는데 공이 황주목사로 와서 내가 황주를 지날 때에 들려보면 행정이 관대하고 진취적 이라서 고 을이 평안하였고 나를 만나서 술병을 들고 태허루(太虛樓)에 올라가서 우정을 즐기고 멀리 강산을 바라보면 심신이 쾌락하여 천사 같은 기분이 었는데 다만 누각(樓關)이 오래되어 기 둥이 상하기도 하여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염려하였는데 명공이 누각(樓聞)을 수리하고 단 장(케抗) 하였으므로 내가 그 사연을 벽에 써서 걸어 놓았다 내가 임기가 다하여 돌아왔 는데 그 후에 여 러 번 황주 강산을 지날 때에 그 누각(樓關)이 그림 같이 아름답게 서있는 데 지금은 공이 보이지 않으니 창연함을 금할 수 없다 지금 공의 장자 대간공과 치-자 진 사공이 나를 찾아와서 비문을 부탁하는데 자싱-하고 검소하고 지덕과 예의를 갖추었으니 가히 공의 후계라고 감동하였다. 정부인 영일(迎 日) 정씨는 홍양(興良)의 딸이요 관찰사 시 성(始成)의 현손이라 공보다 2년 후에 출생하였고 공이 작고한지 이십(二十)년에 아들과 사위들이 다 관직 에 올랐고 세칭 현숙(賢淑)양모(良母)로 덕행이 현숙하여 천륜을 지키는 일, 조상을 받드는 일, 근검(動險) 치가(治家)로 어진 자손들이 뜰에 가득하니 공이 못다 한 규문(關門)을 덕성으로 채우니, 자녀가 이남 삼녀로 장자는 문회(文會) 대사긴~(大司誤) 이요, 이남은 형회(亨會) 진사요, 장녀는 군수 정치우(鄭致愚)에 게, 이녀는 좌랑(뾰郞) 박종 유(朴宗維)에게 삼녀는 윤택열(尹현烈)에게 출가하였다. 장남 문회 대간공이 일남 일녀를 두었고 이남 형회 진사가 형제를 두었는데 아직 어리고 비석문에 이르기를 부모를 섬김 에 공경을 다하고 입신출세에 근심하는 바 없고 관직 생활에 게으르지 아니하고 촉박한 일에 도 여유롭게 비록 장수는 못했으나 많은 복을 스스로 얻고 의로운 늪에서 명공의 혜택이 흐르고 황주 누각(樓關)에 공적 이 남아있네 지금의 자손에게 아름다운 경사 유유히 넘쳐서 큰 역사가 천세에 드높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