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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에 동학이 전파된 것은 1890년 무렵이었다. 최초의 입도자 가운데 하나가 고흥 농민군 지도자인 송년호(宋年浩, 1844~1908)이다. 송년호의 본관은 여산으로 고흥군 점암면 연봉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호는 수암(洙菴), 자는 재국(在國)이다. 1891년에 정영순(丁永詢)과 같이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고흥(당시 흥양)에서는 유희도(柳希道), 구기서(具起瑞), 송년호(宋年浩), 정영순(丁永詢) 등 4인이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전북의 백산성으로 진군하였다. 또한 이들은 이후 전봉준 장군의 지휘 하에 장성 황룡장 전투에도 참가하여 관군을 격파하였으며, 전주성 점령 시에도 농민군 주력부대와 함께하다가 전주화약 이후 고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같이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고흥은 1894년 말까지 10여 차례나 농민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흥양 수령은 이미 농민군의 공격을 피해 오래 전부터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때문에 8월 무렵부터는 공형들이 중심이 되어 관병을 규합, 수성군을 조직하여 성문을 굳게 닫고 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던 중 12월 초에 유복만이 1,000여 명의 농민군을 거느리고 성 밖에 있는 동쪽 산과 서쪽 산을 나누어 점거하고 흥양성 공격을 기도하자 수성군이 강함을 보고 유둔(油芚) 등지에서 머물다가 이내 해산하였다. 이후 수성소에서는 포군을 내보내 관하 지역을 수색하며 농민군을 체포하여 처형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흥양에 처음으로 들어 온 12월 28일 이전에 이미 흥양 수성소에서는 유복만, 오준언(吳俊彦)을 포함한 농민군 27명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당시 유복만 등의 농민군은 고흥 읍성 남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한다. 송년호도 이 때 체포되었으나, 나주로 이송되는 중 탈출하여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기며 살아남았다. 출처 :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