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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니 장남 교민은 단식끝에 끝내 분사하였다. 선생은 이지음 성문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기관지인 운무지를 발간하시려다 일경에 누설되어 폐회 폐간되었다. 이어서 진안, 전주, 장성 교구장을 차례로 거쳐 강습소장 교훈및 도훈을 지내시다. 1918년 1월 오세창, 권동진, 라용환, 홍병기, 홍기조, 최린등과 구국운동을 하시다가 천도교 교지도자 105인, 49인, 45인의 한사람으로 뽑히시어 독립운동기금이 될 대성미 거출에 힘쓰시다. 1919년 2월 손병희선생 지도아래 45인회의에서 3.1운동에 합의 33인 민족대표에는 제자 박준승, 양한묵 두사람을 참여시키고, 기미 2월에 전주부중 이군필집에서도내 여러 지도급 동직들과 모여 동월 임실군 운암면 지천리 천도교 전교실 임실읍 교구실에서 수차 모여 모의하고 3.1운동을 지휘하시다 3월 27일 일경에 체포되어 훅독한 고문이 골수에 스며드니 8월 26일 전주감옥에서 67세를 일기로 옥사하시다. 스스로 삼혁당이라고 호를 지으시니 이것은 동학혁명으로 천번째 혁명하시고, 50세에 머리를 깍아 두번째 혁명하시고, 3.1운동참여로 일생동안 세번이나 혁명한것을 뜻하는것이다. 보청상의 휘는 두희, 자는 화경, 별명은 병옥, 병원, 병희라 하고 도호를 원암이라 하시어 여섯가지의 이름으로 행세하신것은 왜놈의 감시를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1963년 제 45주년 3.1절에 대통령포창을 받으시다. 이제 선생은 가셨으나 드높고 맑은 기상은 만고에 푸르러 길이 청사에 빛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