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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만년 조국의 역사가 최근세에 이르러 어둠 속에 잠겼을 때 망한 나라를 건지기 위해 자기 한 몸의 영화와 안락을 헌신같이 버리던 독립투사들을 우리 어찌 잊을 수 있을 것이랴. 그 중에서도 민족사상의 고취자요 민족교육의 선각자요 민족 자본의 육성자요 민족 언론의 선구자요 영남의 지도자이면서 독립투사였던 이 망실로 백산 안희제 선생이었다. 선생의 본관은 탐진이요 자는 태약이며 고종 22년 을유 서기 1885년 8월 4일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임란때의 명장 지헌 안기종 장군의 후손 발 공의 장남으로 태어나 소년 때에는 고향의 족형 익제공에게서 한학을 배웠으며 1905년 을사매국조약이 강제 체결됨을 듣고 21세의 청년으로서 비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가 한편으로는 신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했다가 양정의숙으로 옮겨 학업을 마치며 다른 한편으로는 성재 이시영 선생 등 애국지사와 접촉했었고 1907년 23세 때 고향에 내려와 종중의 안효제 안석제 선생과 함께 창남학교를 세워 교장에 취임하니 이는 실로 마산 창신학교와 함께 영남 최초의 신교육 기관이었다. 24세때 이우식 선생과 함께 의령읍에 의친학교를 세웠고 25세 때 윤상은 선생과 함께 동래에 구명학교를 세우는 한편 대구에 교남학교를 세워 인재양성에 힘쓰다가 1909년 26세때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있은 뒤 생각한 바 있어 비밀히 만주로 건너가 서상일 김동삼 신팔균 윤세복 선생을 비롯한 80여 명과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다시 돌아와 국내의 지하운동을 계획하다가 마침내 나라가 망하자 27세에 노령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톡에서 독립순보를 간행하며 대종교의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시베리아와 연해주에서 3년을 보낸 뒤 독립운동의 국내 지하 조직과 자금 조달을 위해 30세 때에 고국으로 돌아와 부산에 무역회사를 설립하니 그것이 유명한 백산상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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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소유전답 1천 두락을 방매하여 기본금을 삼고 각지방 동지들의 힘을 모아 5년이 지난 3.1운동 직후에는 1만석에 해당하는 1백만원 자본금의 주식회사를 만들어 민족자본 육성을 위하면서 그보다는 상해임시정부의 연통제에 의한 국내 비밀연락과 독립투사들의 조직 거점으로서 무역 형식을 가장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목적으로 서울 대구 인천 원산과 만주의 안동 봉천 길림 등지에 지점을 열어 일제의 강압을 받으면서도 지혜롭게 사명을 수행했던 것은 실로 독립운동사상에 특기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와 동시에 기미육영회를 만들어 청년 자제들을 해외에 유학시키는 한편 이듬해에는 동아일보 창립 발기인이 되었고 40세 때 이우식 선생과 함께 시대일보를 경영했으며 43세때 백산상회를 자진 해산하고 전진한 동지와 함께 자력사를 창립하여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하다가 49세때 만주로 건너가 동경성 아래 발해농장을 크게 만들어 농민 동포들의 살 길을 열어주는 한편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훈련하여 무력항쟁을 기도하고 대종교 도사 윤세복 선생과 함께 용강현을 중심으로 5년 동안 쉼없이 활동하다가 대종교 경전, 간행회장으로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경전 수만부를 인쇄 반포한 때문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끝에 병든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56세이었다. 1942년 58세때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나자 옛날의 관련으로 잠시 구금되었었고 이듬해에 만주의 대종교단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을 때 또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만주 목단강 경무처로 압송되어가 9개월동안 70여회의 고문과 악형으로 실신 상태에 이르자 병원으로 옮겨 4시간 만인 9월 2일 향년 59세로 한 많은 세상 여의며 장남 상록씨의 손목을 잡고 일제의 패망이 목첩에 있으니 나는 비록 독립을 보지 못하나 너희들은 볼 것이다 하고 남을 오히려 격려했으며 그해 9월 30일 고향에 반장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