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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박승환(1868.9.7~1907.8.1)
건국훈장 대통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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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환은 서울 반촌(泮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지용(智勇)이 뛰어나 군대에 복무한지 10여년에 육군 참령으로 승진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분격하여 일본인에게 보복하고자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1907년 7월 19일 일제가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양위시킬 때에도 그는 궁중에서 거사하여 이를 제지코자 했으나 화가 황제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중단하였다. 일제는 고종을 강제 양위시킨 후 한국을 완전히 식민지로 병탄하기 위한 준비조치로 한국군의 강제 해산을 추진하였다. 일제와 이완용 내각은 1907년 7월 31일 「군대를 해산한다」는 순종의 조칙을 만들어 놓고는 군대의 저항과 봉기가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극비에 부치고 선포하지 못한 채 먼저 한국군의 탄환을 여단사령부에 거두어들이도록 비밀 훈시를 내리었다. 8월 1일 새벽에 일제는 통감 관저인 대관정(大觀亭)에 한국군의 각 연대장과 대대장을 모아 놓고 「한국군을 해산한다」는 순종의 조칙을 낭독하고 군대해산식을 거행하겠으니 동일 오전 10시에 전 부대를 훈련원에 무기를 휴대하지 말고 집합시킬 것을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가 명령하였다. 여단장 양성환(梁性煥)을 비롯한 장령들은 비분함을 참을 수 없었으나 칙령을 받들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일본군이 4면을 포위하고 있어서 어찌할 수 없이 병영으로 돌아왔다. 일제는 한국군이 훈련원에 집합하는 동안에 일본군으로 하여금 한국군의 영문을 점령하여 대비케 하였다. 한국군 장병들은 1907년 8월 1일 오전 10시 폭우가 쏟아지는 속에서 곡절도 모르고 훈련원에 집합하니, 무장한 일본군 보병과 기병이 포위한 가운데에서 일본군과 한국군 수뇌들이 늘어서서 해산을 명하고 은사금이라고 하여 하사관에 80원, 1년 이상 근무한 병사에게 50원, 1년미만 근무한 병사에게 25원을 주며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한국군 장병들은 그제야 집합한 까닭을 알고 통곡을 하며 은사금을 땅에 던지는 등 비분강개했으나 맨손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