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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서, 앞으로도 훌誌銘 등 금석문과 각종 문집에서 보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익이 科學로 출신했다는 것은 F松隱‘先生文集』어1 실려 있는 ‘社門洞書院 松隱朴先 生奉安文’, ‘行狀’, ‘實趙’, ‘養碼銘’ 등을 근거로 삼고 있다. 물론 이들 기록은 19세기 초에 작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얼마나 사실을 전하고 있는지 불안하다 문집의 내용 가 운데 상대적으로 연대가 올라가는 황희의 ‘흉表’나 下季良의 ‘立陣告由文’, 皇南仁의 ‘遺塊神趙廳誌’, 金大有의 ‘書遺事後’ 어느 곳에서도 박익이 과거에 합격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문집의 여러 詩文에서 박익이 이색, 정봉주, 길재, 박의중 등 당대의 유학자와 긴밀히 교류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길재가 ‘畵像講’에서 그를 ‘理學之宗’이라 칭송했으며, 황희가 ‘幕表’에서 그의 ‘문장과 도덕이 우리 통방을 덮었 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충분히 유교적 지식을 습득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으 며,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로 진출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박익이 과거에 합격한 시기는 공민왕대일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확 인되지 않는다. 공민왕 2년에 경작뽑, 朴尙表과 함께 知貴짧 許伯과 同知頁짧 李뤘을 座 主로 하여 內科에 급제하였다는 견해가17) 있으나, 사실과는 다르다 이색과 박상충이 공민왕 2년에 급제한 것은 사실이나, 이 때 座主는 李齊賢과 洪彦博이었으며,18) 31명 의 급제자 명단 가운데 박익은 보이지 않는다. 허백과 이곡이 좌주로서 과거를 주관했 던 것은 충목왕 3년의 일인데, 이 때 金仁培 등 33명이 급제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현 재 7명밖에 명단이 확인되지 않는다. 박익이 확인되지 않는 명단 가운데 포함되었을지 도 모른다. 그러나 박익의 이때 나이가 16세였고, 당시 과거합격자의 평균 연령이 24세 정도였음을19) 감안하면, 이 시험에 합격했을 것 같지는 않다. 공민왕대에는 모두 10회에 걸쳐 과거를 시행하여 297명의 합격자를 배출한 것으로 집계되는데,20) 확인되는 인물은 모두 243명 정도이다 나머지 확인되고 있지 않은 합 격자 수에 박익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박익의 생년을 감안할 때, 그는 공민왕대 어느 시기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로 진출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7) 문경현, 『國譯 松隱先生文集~, 報本濟, 1999, 해제, 15쪽 18) ~고려사』 권 73, 지 27, 선거 1, 凡選場 19) 박용운, 앞의 책, 306쪽 20) 박용운, 앞의 책, 272쪽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