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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행적이 다시 확인되는 것은 고향에서다. 일본 헌병에 쫓긴 그는 음성 고향마을에 숨어들었지만 엄혹한 시대 상황에서 절대 남의 눈에 뛸 수가 없었다. “일본군에 쫓겨 우리 집에 오셨어. 어떻게 해. 광 안에 빈 독을 엎어놓고 그 속에 숨겨 드렸지. 거기서 무려 다섯 달이나 사셨는데, ‘의병을 숨겨주다 들키면 징역 가니 더 이상 피해를 줄 수 없다’며 어디론가 사라지셨지.” 박순종씨의 생전 회고다. 그 후 최삼현이 몇 해에 걸친 오랜 도피생활 끝에 동료 2인과 함께 마지막으로 숨어 든 곳은 바로 용인이었다. 좌전고개 인근에 있는 양지면 도창말에서 이천시 마장면 해월리 기네미를 거쳐 백암면 가창리 두평이란 마을에 한 밤중에 나타난 것이다. 당시 의병 항쟁은 중단됐지만 서슬 퍼런 일제 치하였던 관계로 머슴으로 신분 위장을 했다. 각기 세 사람은 인근 동리 부잣집으로 흩어진 것이다. 그는 가창리 학자골에 안씨댁이 부자라는 소리를 듣고 그 곳에 위탁했다. 밥만 먹여주는 조건으로 농사일을 한 것이다. 열심히 숨어 일하길 수년. 어느 덧 나이는 20대 중반이 되어 있었다. 그의 과거 행적은 몰랐어도 마침 한 마을에서 성실한 그의 모습을 유심히 보아왔던 이웃에 의해 14세의 처녀와 데릴사위로 결혼을 했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 부인은 어린 14세 상산(商山) 김씨였다. 넉넉한 집안의 5대 독자 최삼현. 결혼 후 5남2녀를 두고, 대부분 의병들이 그러하듯 돌산(乭山) 또는 현수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던 그는 해방 될 때까지 과거 행적을 일체 감추었다. 해방 이 된 후에도 수십년 응어리 진 가슴 속 얘기를 꺼내는 것은 8.15 해방절이나 국치일 등 특별한 날 뿐이었다. ‘왜놈들은 죽일 놈이다. 너희들도 알아야 한다’그 정도셨지요.” 오히려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과거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했던 것은 어머니와 주위 어른들이었다. “음식투정을 하는 자식들에게 어머니가 ‘너희 아버지는 나라를 구하려고 4,5년간 찬밥도 못 먹고 밤잠도 못 주무시면서 고생하셨는데…’라고 하셨지요.” 한 번은 어린 초등학교 시절 하교 길에 한 친구가 “의병은 먹을 것이 없어 굶기도 하고, 남의 밥을 훔쳐 먹기도 했다고 선생님이 그러더라”는 말에 풀이 죽고 섭섭하던 차에 지나가던 어른이 그 얘기를 듣고 아버지 이름을 거명하며 “그 분은 옛날에 일본과 싸웠던 의병이셨고, 대단한 애국자였다”며 “너희들이 더 커서 공부를 하게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다”고 말해 큰 격려가 됐던 것을 생생히 기억하는 세째 아들 최완영(64)씨다. 이름도 명예도 없이 역사의 밀알이 되어 묻힌 최삼현. 그가 더 세상에서나마 갈구하는 것은 무얼까. 때마침 과거 친일행적을 규명해 역사를 바르게 세우자고 하는 것조차 정쟁의 대상이 되고 번번히 좌절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과거를 애써 숨기는 것처럼, 의병에 나섰던 최삼현 선생 역시 평생 자신의 행적을 제대로 후손에 알리지 않고 가슴속에 묻은 채 세상을 등졌다. 오늘날 이러한 현실을 미리 짐작이라도 했단 말인가. 출처 : 용인시민신문사 2004.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