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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살리라 |311| 부터는 청문회를 개최하였고, 문교공보위원회에서도 1980년 이후의 언론통제 및 1980년 언론인해직에 관한 청문회가 개최되었다. 의정사상 최초로 열린 이 청문회는 TV와 라디오 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면서 국민적 관심을 고조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문사유가족들은 10월 6일 기독교백주년기념관에서‘군대내 의문사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공동대책위’ 16) 를 발족하였고, 10월 17일에는 기독교회관에서‘의문 사 유가족협의회’(초대 회장 임분이 17) )로 확대 개편하여 발족함과 동시에 진상규명을 위한 집단적인 농성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투쟁은 다음 해인 1989년 2월 27일까지 전개되었는 데, ‘의문사 진상규명 촉구 및 폭로대회’ 18) 를 개최하였고, 정기국회가 열리자 국회의사당 에 들어가서 국회의원들에게 의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려다 전원 연행당하기도 하였으며 19) , 전두환∙이순자 구속 촉구 행진 후에‘의문사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위한 시민대 회’ 20) , 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광주학살 책임자 처벌 및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대 회’ 21) 등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집회와 시위를 직접 개최한 이외에도 6월 항 쟁 이후 민주화운동이 고양되어 다양한 집회나 시위가 열렸는데, 거의 모든 집회와 시위에 참가하여 22) 의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였고 전투경찰과 대치하는 최전선에는 항상 의문사 유가족들이 있었다. 23)24) |310|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1. 가지 않은 길 - 입법을 위한 투쟁 의문사 진상규명을 이루기 위한 운동의 양태는 민주화운동의 전개 과정, 그리고 정치 상 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전개 과정과 수단 등에 있어서 변화를 가지며 진행되었다. 1-1. 제13대 국회의 여소야대 정치상황에서의 의문사 진상규명 운동 1987년 6월항쟁 이후 1988년 치러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집권 여당인 민주정 의당은 전체 299의석 중 125석으로, 야당인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 화당 35석, 무소속 10석 등보다 적은 여소야대 정국의 정치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출 발한 제13대 국회는 1988년 6월 11일 청문회 등을 신설하는 내용으로 국회법을 개정하여, 6월 27일‘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비리조사특별위원회’ 14) 와‘5.18광주민주화운 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15) , ‘양대선거 부정조사 특별위원회’등을 구성하였으며, 11월 3일 14) http://www3.assembly.go.kr/file/2002000112000110203253.htm, 이하‘5공 특위’라 표기함. 1988년 6월 21일 여∙야의 김 윤환∙김원기∙최형우∙김용채의원외 186인으로부터 제5공화국에있어서의정치권력형비리조사특별위원회구성결의안이 발의되어 6월 27일 국회운영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같은 날 제142회국회(임시회) 제9차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됨에 따라 헌법 제61조 및 국회법 제120조의 규정에 의하여 제5공화국에있어서의정치권력형비리조사특별위원회가 설치되고 특별위원수는 31인으로 하 되 각 교섭단체 의석비율로 구성하였다. 이 특위는 1988년 7월 7일 제1차위원회를 연 이래 전직대통령의 증언을 듣기 위한 1989년 12월 31일의 5공∙광주특위연석회의 까지 모두 36차의 위원회 전체회의 조사활동(5차의 전체회의현장조사활동별도)과 4개소위원회의 38차 조사활동 그리고 4개조사 반의 22차 조사활동을 통하여 동특위조사대상 44건중 ㉮일해재단의설립배경 및 자금조성관련 비리 ㉯새세대육영회∙새세대심 장재단관련 비리 ㉰ 오 대 양 사 건 ㉱ 삼 청 교 육 대 의인권비리 ㉲부실기업조사(조사대상: 국제그룹, 경남기업, 대한선주, 명성그룹, 일신 제강, 공영토건) ㉳인권관련비리조사(조사대상: 의문사, 10∙27법난, 서울제일교회폭력사건, 강제징집녹화사업, 관계기관 대책회 의) ㉴대통령별장(청남대건립및대청댐수문조작으로 인한 인명, 재산피해의혹 조사) ㉵ 전 두 환전대통령 부모묘 성역화비리 ㉶ 각 시도지사 공관내 대통령 전용시설 건립비리 ㉷ 전 두 환전대통령 일가의 비리 및 재산 해외도피의혹 ㉸ 노 드 롭항공기사건 ㉹ 골 프 장 인가과정의혹 ㉺ 박 정 희전대통령 서거직후 청와대 재산 행방의혹 ㉻ 1980년 부정축재 환수재산 처리의혹 원전 11, 12호기 도입 및 수주관련의혹 금호그룹 제2민항 허가 1980년 공직자 숙청 이상 20건(부산하이야트호텔 인수설, 명성사건 및 장영자어음사기 사건은 부실기업에 포함)에 대하여 조사활동을 벌였으며, 조사대상 44건중에는 포함 안된 기타사항으로 언론통폐합, 정치자금, 6∙29선언 등에 대하여 증언청취조사를 실시하였다. 15) 이하‘광주특위’라 표기함. 1988년 6월 22일 제142회국회(임시회) 제3차국회운영위원회는 1988년 6월 21일 여(민주정의당), 야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가 각각 발의한 5∙18관련특별위원회구성결의안을 폐기하고,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 사특별위원회구성결의안을 국회운영위원회 대안으로 채택하였다. 이 특위는 특별위원수는 28인으로 하되 교섭단체별위원수는 각 교섭단체의석비율로 구성키로 하였다. 이 조사특위는 위원회전체회의를 총 32회 열었으며 이중 17회가 청문회 방식이었다. 현장 검증소위원회는 총 6회, 한미관계소위원회는 총 4회, 그리고 제5공화국청산차원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 출석증언형식인 5공, 5∙ 18광주특위연석회의는 총 2회(청문회방식 1회) 또 총무처와 육군본부를 조사대상으로 한 자료 검증반 및 광주현장 조사반도 몇 차례 활동을 가졌다. 또한 이 특위는 청문회를 열어 전두환 전 대통령등 106인의 증인과 정상용 등 연 30인의 참고인을 출석시켜 그들의 증언 및 진술을 청취하였다. 그런데 증인들간의 증언내용이 상반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최규하∙전두환 전대통령 등 5∙18 광주특위의 청문회증인출석 동행명령장 발부에도 두차례(89.1.26, 89.2.22) 씩이나 불응 거부하였다. 16) ‘군 의문사’사건 유가족들이 의문사 유가족들의 조직적 출발점이 되었다. 17) 1987년 대선 당시 군 부재자투표와 관련하여 사망한 정연관 상병 모친. 18) 1988년 10월 27일 19) 1988년 10월 29일 20) 1988년 11월 12일, 명동성당, 5백여 명 참가하여 촛불 행진과 경찰과의 격렬한 몸싸움 전개. 21) 1989년 2월 11일 22) 집회나 시위 이외에도 당시 빈번하게 열린 시국사범 재판에도 참여하였는데 1988년 11월 14일‘미대사관 사제 폭발물 투척사건’ 재판 방청 도중 박선영(서울교대 재학 중 사망, 초기에는 의문사로 분류), 정연관 모친이 재판부에 항의하다 법정소란죄로 연행되 는 일이 발생하여, 20여명의 의문사 유가족들이 법원에서 철야 항의농성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박선영, 정연관 모친은 1989년 2월 27일 징역 8월을 선고받아 시국사범의 재판에 항의하다 스스로 시국사범이 되는 일이 야기되었다. 이러한 등의 문제 와 1989년 2월 22일 5공 특위에서 의문사 사건을 다루기로 함에 따라 의문사 유가족들은 장시간의 논의 끝에 기독교회관에서의 135일간의 농성을 마무리하게 된다. 23) 농성투쟁 과정을 거치면서 다수의 의문사 가족들이 농성에 합류하고 회원으로 가입하여 조직적 기틀을 갖추게 된다. 1988년 11 월 당시, 의문사 유가족들 35명이 농성에 참여하였고 회원 가입을 하였다. 24) 이렇게 전투경찰들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경찰에 연행당하는 일이 일상적인 일이 되다시피 하였는데,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난지 도 쓰레기 처리장에 버려지거나 하는 등으로 격리되었으나 형사 입건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88년 11월 16일에는 우종원, 김성수, 정경식, 이태춘(1987년 6월 항쟁 당시 부산에서 최루탄 피격으로 사망, 한동안 의문사로 분류) 모친이 집시법 위반으로 각각 7~10일 간 구류 즉결처분을 받기도 하였고, 1988년 12월 24일에는 과천 정부종합청사에서 항의농성 진행하던 중에 이이동 부친 등이 경찰에 맞아 병원에 입원하고 나머지 회원들은 안산, 광명, 안양경찰서에 분산 연행되어 불구속 입건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