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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익은 고려가 자주성을 상실한 元간섭기에 태어나 어린시절을 고향 밀양에서 보냈 다 족보와 19세기 초에 柳台f左가 지은 ‘行狀’, 李헬가 쓴 ‘實鏡’에 의하면 박익은 충숙 왕 복위년(1332) 밀성군 鎬浦里 맺6第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鎬浦里는 고려시대 흙浦쩨이었다 鎬浦里의 ‘鋼’은 본래 ‘됐’으로 표기되었던 것 같은데, 19세기 초에 편찬 된 것으로 보이는 『密陽府둠誌、』 功里조에는 府北面에 前級浦, 外級浦, 內級浦가 있다. 그 內級浦의 쨌註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산기숨에 옛날에 돌을 누르는 암자[빼石魔1가 있었다. 산꼭대기에 호랑이가 엎드 려 있는 형상의 돌이 있었는게, 바로 官內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때문에 여기에 사찰을 세워 이를 누르고, 또 윷나무를 심어 돌의 기운을 약하게 했다. 암자는 지 금 없다. 세 浦는 모두 옛날의 흙浦빼이다 7) 즉, 府北面의 3개 浦는 모두 옛날의 흙浦獅이었다는 것이다. 없浦가 흙浦쩨이었다는 것은 『좋야합東國與地勝훌훌』에서도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흙浦獅을 級浦라 하고 ‘흙’ 과 ‘級’은 방언으로 같은 말이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8) 그러면 둠誌、에서 ‘옛날’이라는 것은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일까? 고려시대 밀성군에는 來進獅, 雲;뽑빼, 蘇浦갱~, I윷용 所, 歸化部曲, 豆也保部曲, 伊쪽륨部曲, 今륨꺼部曲, 橫代部曲, 烏丁部曲, 平陸部曲, 古買 部曲, 삼良村部曲, 破西防部曲, 近皆部曲, 陽良部曲 동 쩨 · 所 · 部曲이 있었다,9) 이것이 『世宗實錄地理志」 단계, 즉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來進椰, 豆也保部曲, 伊쌍륨部曲, 今륨 까部曲 등 4개만 남아 있었다,10) 蘇浦椰을 비롯한 12개는 이미 일반 군현으로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날에 蘇浦獅이었다는 것은 고려시대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 다. 蘇浦빼이 고려시대 어느 시기까지 쩨으로 남아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려중 기인 12세기 이래 향 · 소 · 부곡은 점차 해체되어 독립 군현이 되든가, 다른 군현에 來 l휩하거나, 直村化하고 있었음을 감안하면,11) 흙浦椰도 고려말까지 獅으로 남아 있었다 기 보다는 고려후기 어느 시기에 밀성군의 直村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7) r山魔有柳石I휩 山頂有石虎代形 直鏡官內 故置츄以憶 又樹뚫木 以消石氣 흉今無 三浦井古蘇浦빼」 (L"密陽府둠誌~, 야里, 府北面) 8) r~n級浦 蘇級方言相類J(L"¥「얘東國典地將寶』 권 26, 경상도 밀양도호부 古빼 蘇浦했m 9) ~新增 東國與地聯魔』 권 26, 경상도 밀양도호부 古剛 10) ~世宗實錄地理志、』 경상도 경주부 밀양도호부 11) 박종기, r부곡제의 변질j, 「고려시대 부곡제연구.!i> 서울대출판부, 1990, 195 -,204쪽 - 1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