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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 성할때와 쇠할때가 있는 법이며 나라와 사람도 시절을 잘만날때가 있는 법이다. 한말에 이르러 나라는 파당의 분란에만 골몰할뿐 세계의 조류에 어두어 국력이 쇠퇴하였고 또한 척불과 법려들의 수행이 투철하지 못하여 불가의 종풍이 미약하였다. 그 허물이 어디에 있는가? 이는 국가를 맡은 자들이 공리공론에 빠져 실학에 힘쓰지 아니하고 더구나 사리사용에 눈이 어두워 파쟁으로 정권을 농락하면서 민생을 돌보지 않음으로써 국기가 흔들리고 강산과 백성이 피폐해지기에 이르렀다. 석씨문중에서는 총림과 강원의 논의가 갈라지고 돈교와 점교의 구분이 혼돈되어도 이를 바로잡는이가 적으니 내전도 밝게 아는이가 많지않고 선풍 역시 지작되지 못하였다. 이처럼 국운과 불교의 힘이 쇠잔해지고 열강은 이리떼처럼 식민지 획득에 혈안이 되어 조선의 강산을 넘보는 풍운의 시대에 제주 한라산 서귀포 기슭에 한 동자가 출생하였으니 그가 곧 벽담 동화대종사이시다. 사의 휘는 동화요 자는 하룡이고 법명은 묵연이며 호는 벽담이다. 보관은 남양이고 속성은 방씨이다. 조선왕조가 멸망하기 15년전인 개국 496년(서기 1887년) 정해 8월 8일 제주도 서귀포시 대천동에서 부 우필과 모 여산송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조부 진사공 실규는 입도조로서 고종 13년(서기 1876년) 늑임관으로 본도에 부임하였다. 부 또한 진사로서 관직에 임하였다. 사는 유년시절 체격이 강건하고 총명준수하여 친구들을 리드하는 지도자의 풍모가 뚜렸하였다. 10세때부터 하원동 김성균하에서 사략통감 사서등을 수학하면서 등과의 꿈을 갖기도 하였다. 그러나 24세되는 융희 4년(1910년) 마침 나라가 일본의 강박으로 병합되는 비운에 처하였다. 국파산하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