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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재룡(禹在龍)은 1903년 대구진위대(大邱鎭衛隊)의 참교(參校)로 있던 중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탈영하여 1907년 정용기(鄭鏞基)의 산남의진(山南義陣)에 투신하여 연습장(練習將)으로 있으면서 청하(淸河)·영일(迎日) 방면의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정용기가 전사하자 정환직(鄭煥直)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선봉장을 맡아 흥해(興海)·신영(新寧) 등에서 전과를 올렸다. 그러던 중 무기구입을 위해 대구에 잠입하였다가 일경에 붙잡혀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11년 특사로 풀려났다. 1915년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김경태(金敬泰) 등의 동지와 함께 대구에서 혁명단체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였다. 대한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혁명기지로는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하였는데, 이같은 혁명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 및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그는 조직확대를 위해 만주로 파견되어 1915년 12월 길림(吉林)에서 손일민(孫一民)·주진수(朱鎭洙)등과 함께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부민단(扶民團)·신흥학교(新興學校) 등과 연계하여 혁명기지의 건설에 힘썼다. 또한 만주에서 국내의 자산가들에게 군자금수합의 통문(通文)을 발송하는 한편 김한종(金漢鍾) 등을 통해 군자금 모집과 부일배(附日輩) 처단활동을 펴게 하였다. 그런데 1918년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노출되어 동지들이 붙잡히자 몸을 숨기고 있던 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권영만(權寧萬)·안종운(安鍾雲)·소진형(蘇鎭亨)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이들은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더욱 조직적인 활동을 펴기 위해 1920년 음력 6월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하고 임시정부 발행 공채증서의 매각, 독립운동자금수합 등의 활동을 펴던 중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22년 경성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6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1937년 출옥하였다. 광복후에는 대한광복회의 재건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