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page
152page
보성사(普成社) 터
보성사는 1919년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곳이다. 보성사는 30평 2층 기와 벽돌집으로 전동 보성학교 구내에 있었으며 보성사의 소유주이기도 했던 천도교 교주 의암 손병희의 특명으로 육당 최남선이 초안을 집필하고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넘겨받아 사장 이종일, 공장감독 김홍규, 총무 장효근이 1919년 2월 27일 밤에 3만 5천매를 인쇄하였다. 일본측의 형사에게 발각되는 위기도 있었으나 족보책이라고 위장하여 위기를 넘겼다.
3월 1일에는 윤익선과 이종린, 이종일, 김홍규 등이 지하 신문인 〈조선독립신문〉 1만부를 계속 발행하였다. 일경은 보성사를 즉각 폐쇄하였으며 1919년 6월 28일 밤에는 불을 질러 태워버린 이후 터만 남아 오늘에 전한다.
(기념비 하단 그림에서 보성학교 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 홰나무 뒤에 지붕만 보이는 2층 건물이 보성사. 당시 수송동 44번지, 현재 조계사 대웅전 경내에 그 홰나무가 남아있음)
보성사를 기념하는 조형물 "3인의 군상과 민족정기"는 전체높이 6.35m(조형물 5m, 좌대 1.35m) 면적 9.41㎡.(가로, 세로 각 3.1m)의 화강석 및 청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부 청동구조물은 3인의 군상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치켜 든 모습으로 민족의 기상과 단결을 의미하고 하부 석재 조형물은 보성사의 옛모습과 3.1운동 장면을 양각하고, 기미독립선언서는 음각하였으며 맨 밑의 석판은 가로, 세로 3.1m가 되게 제작하여 3.1운동이 우리 민족사의 초석이 되었음을 상징한다. 전체적으로 만족의 얼을 상징하는 이 조형물은 위에서 보면 태극문양 형식을 취하고 있어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고 있다.
조각:석정 정대현(서울시립대 교수), 글씨:성곡 임현기, 알림판 글·제작: 보성교우회
1999.3.1.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