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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당시23세)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66년 3월 21일 전북 장수군 출생 1979년 빈암 중학교 입학, 3년중퇴 1985년 서울 상경 동대문 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함 1988년 7월 31일 (주)서광구로공장에 입사 1989년 1월 쟁의부장 임명 1989년 4월 18일 노동운동 탄압분쇄, 임금인상 완전쟁취, 서광 구로지구의 독자적 운영 쟁취 등을 내걸고 파업시작 1989년 5월 4일 오후 1시 15분경 회사측의 탄압에 맞서“무노동 무임금 철폐” “민주노조 사수”“동지들을 탄압하지 말라”고 외치며 분신 밤 11시 30분 영등포 한강성심병원에서 운명 |296|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노태우정권 노동 동지의 삶과 죽음 서광노동조합은 ’88년에 부평과 구로의 통합대의원대회를 열었고, 이때 선출 된 부평공장 출신 위원장은 구로지부 집행부를 꾸리지 않았다. 이에 구로지부 조 합원들은 조속히 꾸릴 것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구로지부는 조합원 총회를 통해 95% 이상 찬성으로 지부장을 선출하였으나 부평공장 위원장은 지부를 불 인정하고‘부평위원장 불법선동죄’라는 이유로 지부장과 임원을 제명, 정권시켰 다. 이후 구로지부는‘노조탄압 중지’와‘집행부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인 결과 ’89년 1월 조합원 총회를 통해 새로 정식 집행부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그 러나 회사 측은 라인축소, 식당(조합원 총회장소로 이용), 탈의장 축소 등 노골적 인 노조탄압을 가해왔다. 조합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조합원 임시총회를 거쳐 임금인상안을 결정하였으나 본조 위원장은 다른 안을 제시하며 총회를 요구하였 다. 이에 구로지부는 위원장의 독단적인 행태에 반대하여 총회를 거부하였다. 이 에 본조는 지부장을 비롯하여 임원 3인에게 제명, 정권조치를 내렸다. 지부는 4 월 4일부터 민주노조 사수와 제명, 정권철회 및 임금인상 승리를 위한 준법투쟁 을 전개했다. 지부 조합원들은 4월 18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삼미노조에 연대갔다 오던 중 회사 측이 정문을 막고 사진을 찍는데 항의하고 사진기를 뺏으려 했으나 느닷없 이 출두한 경찰이 지부장과 간부 4명을 강제 연행해갔다. 이에 분개한 조합원들 은 전면파업에 돌입하게 되었다. 4월 21일 부평본조에서 구사대 백여명이 파견 되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투쟁을 벌여 5월 3일 회사 측과 협상한 결과 ‘쟁의기간 임금 90%이상 지급,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노조간부 3인에 대한 징계처리를 최대한 가볍게 한다’고 약속하였으나 다음 날에 약속을 번복하 여 협상이 결렬되었다. 당시 쟁의부장이던 동지는 이에 격분하여“민주노조 사수 하자”“셋방살이 노동자의 서러움은 싫다”“동지들을 처벌하지 말라”고 외치며 분신하였다. 동지는 이날 밤 11시 30분경, 차마 눈을 감지도 못한 채 공안정국의‘무노동 무 임금’논리와 회사, 본조의 지부탄압에 온몸으로 항거하며 영원히 우리 곁을 떠 나갔다. “세상살아가는동안가장중요한것은진실이다. 진실을알면서도회피하는것, 노동자들의투쟁이정당하고인간다운삶을위한것이라는것을 알면서도함께하지못하는것은동지에대한배신이다.” - 동지의생전에남긴말「김종수열사추모집」중에서- 끝내살리라 |297|